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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年6月18日 礼拝 説教(日本語文、韓国語文)マタイ2章13〜23節

 

2017年6月18日  マタイ2:13-23 「エジプトに逃れよ」

序文)主イエスは誕生して、いのちの危険にさらされた。ヘロデ王の王位を狙うものの誕生という思い過ごしと誤解からくる残虐行為の正面からの対象とされていた。ヨセフは一家の危機を知らなかった。神は救い主として遣わされた御子のいのちを守るためにエジプトを用いられた。それは、旧約時代にモーセを遣わしてエジプトに400年間奴隷としてかくまっていた選びの民を救い出させた出来事の本来の使命を、幼子イエスを用いて新約時代の特にイスラエルの読み手に悟らせる目的があった。マタイはメシア・イエスの幼子時代を描くことで、同胞たちにこのことを理解させたかった。

 

Ⅰ 13-15節 エジプトに逃れよ。

1 この事件は博士たちがイエスの誕生を祝い、訪問し、礼拝した事柄に端を発した。なぜなら彼らがキリストを訪ねて来なければ、どこにイエスとヨセフとマリヤが住んでおられるかは、分からなかったのだから。それまではイエスは安全に育てられていた。人生の最後、十字架を目前にエルサレム入城に際して、民衆の中でイスラエルの王様万歳・ホサナと歓呼の叫びを聞くほどの歓迎を受けることは全くなかった。しかしヨセフは、主の使いから夢の中で、突然に幼子の危機を知らされた。原因も知らされた。ヘロデが幼子を探して殺そうとしている。神は敵対する者たちの教会に対する残虐な計画・意図を、ことごとく知っておられる。アッシリアの王セナケリブに向かって主は言われた。「あなたがすわるのも、出て行くのも、はいるのも、わたしは知っている。あなたがわたしに向かっていきり立つのも」(イザヤ37:28)。生まれ落ちた時から主イエスはこれほどの危険にさらされ、困難な環境に置かれていた。預言者エレミヤも生まれた時から「国中の争いの相手」とされた(エレミヤ15:10)。主の教会は次のように言うことができる。「彼らは私の若い頃からひどく私を苦しめた」(詩篇129:1、2)。神はそれらを知っておられる。対処される。エジプトに逃れよ。主は成長して神の国の福音を伝えておられた時に「彼らがこの町であなた方を迫害するなら、次の町に逃れなさい」(マタイ10:23)と言われた。避難することが主のみ心である場合がある。とどまることだけでなく、逃れることも重要。それは全てを知っておられる主からの指示である。

 

2 ヨセフの素晴らしいところは、直ちにその夜のうちに幼子と母を連れて言われた通りエジプトに立ち退いたことである。間髪を入れずに従った。旅の準備も、彼の地での生活の不安も考える余地なく、「立ち」「夜のうちに」出かけた。主に従うことの模範がある。信仰の父アブラハムが昔、主に従ったようにである。神にのみ信頼して出かけた。幸いなことにヨセフたちは富める者でなかった。いっぱい捨てなければならない物や、残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財産があったわけではない。それらに気をひかれて躊躇することもなかった。貧しいゆえの幸いがあった。人が危機の時に持って行けるものはわずかなのです。まして天国にはいる時は、身一つなのです。宣教師方やご家族も身一つで移動し続けます。主に従う秘訣の一つは身軽さでしょうね。

 

3 なぜ、エジプトなのか。マタイはホセア預言の成就であると説明している。ホセア11:1「イスラエルが幼いころ、わたしは彼を愛し、わたしの子をエジプトから呼び出した。」この預言は、「わたしの子」といっている。神の子らがエジプトにいたので、神はモーセを遣わして救い出された。あの出来事から、ホセアの時代までさらに長い時がたっていた。そこでまた、「わたしの子をエジプトからよびだした。」といわれたので、この「わたしの子」は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のことであるとわかります。「エジプトに逃げよ」とみ使いはいった。実はエジプトはイスラエルにとっては400年間奴隷の家であったところ。偶像崇拝、専制政治、昔、長子が神の使いに殺された原因である神の民への憎悪を忘れないところ、モーセが誕生した時にイスラエルの男子の赤ん坊は殺されたところなのです。そういう歴史からいうと、神は、最悪の場所に御子イエスをかくまおうとされた。最悪の場所で神は最善の目的を達成しようとされた。父と母にとっては幼子について誕生の時、聞いていた神の言葉を疑うような司令である。「み民イスラエルの栄光」ですと聞いていた。彼らの信仰が試された。しかし、彼らは堅くたって揺るがなかった。この子は聖霊により身ごもって誕生した神の御子である。直ちにその夜のうちに出かけた。私たちの契約の子が苦境に立たされた時に、主イエスが幼い時に出会った苦境を覚えよう。

救い主となる幼子をイスラエルのどこにでも安全に引き受けるところはなかった。エジプトしかないと神は判断された。ユダヤを追われたキリストをエジプトが受け入れた。これは救い主の将来の救いの広がりを暗示している。ユダヤ人が十字架につけよと叫んだ後に、福音は全世界に伝えられることとなった。

 

Ⅱ 16-18節

1 博士たちが立ち去って後のヘロデ王のことがしるされている。博士たちが戻って来て幼子の居場所を教えてくれると思っていた。そうすれば一ひねりで新しい王を殺すことができた。ところがそうならなかった。ヘロデは怒り狂った。「非常におこった。」落胆し絶望と憤怒の度合いは高くなった。執念深い不正行為をかさねて罪深さを増し加えた。ユダヤ人の王として生まれた新しい王の命を確実になきものにするために、ベツレヘムとその近辺の2才以下の男子を一人残らず殺させた。政治力が悪のために用いられた。ヘロデ王はその出身がエドム人であった。イスラエルに対する憎悪は彼らの骨の髄までしみこんでいた。ダビデに対する怒りから、サウル王の命令により、エドム人ドエグは「王の祭司たち」を全部打ち殺した(第一サムエル22)。85人もであった。非人間的な手段を用いたのである。ヘロデも例外では無かった。彼の統治の全期間にわたって残忍であった。専制君主にかかれば、子どもといえども無辜の内に殺されてしまう。ヘロデは自分の子ども三人を殺したとユダヤの歴史家ヨセファスが「ユダヤ古代史」に書いている。ヘロデはこの後にユダヤの国会議員全員を処刑したと伝えられている。ヘロデは70才ぐらいであったと言われている。この男が2才の子どもたちが成長して自分の地位を襲うと妄想した。傲慢と残酷な獣のような欲求を楽しませるために殺人に走った。

 

2 殺人命令の範囲は「ベツレヘム」だけでなく「近辺」の村々もはいった。ひどすぎる範囲であった。同時に、これらの子どもたちはキリストの故の迫害により殉教したのと同じである。彼らがイエス・キリスト誕生の故に殺されたとしたら、その魂たちの天における神の扱いは決して無為になるはずはない。「あなたは幼子と乳飲み子の口によって、賛美を用意された」(マタイ21:16)。これは主イエス・キリストがエルサレム入城のときに子どもたちが「ダビデの子にホサナ」とさけんだ事への祭司長、律法学者たちの抗議に対して答えられた。神は救い主のために幼子、子どもたちを用いられる。天においても賛美は幼子たちによってささげられている。

 

3 旧約聖書エレミヤの預言の成就 「ラマで声がする。泣き、そして嘆き叫ぶ声」この預言は、エレミヤの時にネブカデネザル王がエルサレムを破壊したあとで、捕囚の民をラマへ引いていき(エレミヤ40:1)刃にかけるなり、捕囚とするなり、彼の意のままに取り扱ったときに、一端成就した。ラマの嘆き叫ぶ声がベツレヘムにまで届いた。両方の町は近くに存在した。それが今、また、成就した。今は、ベツレヘムからラマに届いた。ベツレヘムはベニヤミンを生んだときに母親ラケルが死んで葬られた地である。そこに墓があった。ラケルの子孫はそこに住んでいた。2才以下の子どもたちを持っていた母親も、ラケルの経験をした。「嘆き叫ぶ声」この大苦難を人に実感させるのは、聖書時代だけではない。現代の戦争地域、紛争地域で子どもたちが犠牲になり親たちの嘆き叫びは響いている。

「慰められることを拒んだ。子どもたちがもういないからだ。」イスラエルの慰めとなるはずのメシヤが、このような悲しみを味わわせるものとして、世に紹介されてよいものでしょうか?それはありうる事として、聖書は告げている。そうして聖書は成就されねばならない。マタイは同胞にこのように告げているのです。私たちが、これにつまずかないで、さらにエレミヤ記を読み続けると、この出来事は、このうえない喜びへの序曲にすぎない事がわかります。エレミヤ31:16-17「主はこう仰せられる。あなたの泣く声をとどめ、涙の目をとどめよ。あなたの労苦には報いがあるからである。主のみ告げ。彼らは敵の国から帰って来る。あなたの将来には望みがある。主のみ告げ。あなたの子らは自分の国に帰って来る。」事態は最悪である。しかし修復は速やかに続く。「ひとりのみどりごが、彼らのために生まれ」(イザヤ9:6)、そのおかげで人々の失ったものは、じゅうぶんに償われる。

 

Ⅲ 19-23節

1 主のみ使いがヨセフに言った「立って、幼子とその母親を連れて、イスラエルの地に行きなさい。」ヘロデが悲惨な死を迎えた年はBC4年である。それでイエス・キリスト誕生はBC4年頃と考えられている。エジプトはしばらくの滞在地であった。身を隠す地ではありえても、永住の地ではなかった。イエス・キリストは「イスラエルの家の滅びた羊」に遣わされたからである(マタイ10:6)。

天からの召命をなしに、あちらこちらと移動してまわるのは考え物である。神樣にはご計画がある。そこにあなたを置いておられるのには意味がある。エジプトでイエスと家族を守られた神は、いまやイスラエルに帰るようにと命じられ、そこでも交わりを大切になさる。

2「アケラオ」は、父の王国の南部だけを相続した。父親に似ていた。そのためにAD6年に失政によって免職された。「ガリラヤ」はアケラオの異母兄弟ヘロデ・アンテパスによって支配されていた。メシヤを養育するにはより安全な場所であった。マタイは聖書の観点から、イエス・キリストが「ガリラヤ」のナザレに住んだと書いた。マタイはマリヤがイエスを身ごもったときにナザレにすんでいた(ルカ1:26,27)事に何も言及していない。「ナザレ」はそういう意味で、ヨセフ、マリヤにとって友人知人が多くおり、親類筋もいたと考えられる。一家が落ち着く先としては格好の地であった。それで救い主は「ナザレのイエス」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

 

3 「これは預言者たちを通して、“この方はナザレ人と呼ばれる”と言われた事が成就するためであった」(22節)。ここはいろいろと理解が難しいところです。まず「預言者たち」と複数形で書いてある。だれか一人の預言者がいったのではない。「ナザレ人」とどこかに明白に書いてある訳では無い。幾つかの預言が結びつけられて、意味を取っていると考えられる。マタイは「ナザレ人」ということばで、「ナザレの住民」といおうとしたと考えられる。このことはユダヤ人には躓きなった。彼らは「ナザレから何の良き者がでようか」と言っていたからである。また「ナザレから預言者は出ない」ともいっていた。要するに「ナザレ人」(原語:ナゾーライオス)ということで、取るに足らない、風評の、ちいさな田舎出身というような、メシヤが人のさげすみの中で、軽んじられて育ったということを、言おうとしている。イザヤ53章にメシヤ預言など複数の預言が若枝で、芽生えてすぐに枯れるような危険の中に育つメシヤ観を醸し出している。詩篇22篇6.7節「わたしは虫けらです。人間ではありません。人のそしり、民のさげすみです。わたしを見る者はみな、私をあざけります。彼らは口をとがらせ、頭を振ります。」イザヤ53章2.3節「彼には、私たちが見とれるような姿もなく、輝きもなく、私たちが慕うような見ばえもない。彼はさげすまれ、人々からのけ者にされ、悲しみの人で病を知っていた。」ゼカリヤ11章4-11節、等に出てくる預言の成就であるとマタイは言いたかったのである。

当然これは「ナジル人」(原語:ナジライオス)(民数記6章)を指しているのでないので誤解のないように。

メシヤが、「ナザレ人」イエスといわれることは、彼から何の良いことも期待できない。何の尊敬も価しない。軽蔑されるべき輩であるというに等しい呼び名であった。

 

結び)マタイは旧約聖書のメシヤ預言にかなって、誕生された幼子イエスが取り扱われた事を示している。それだけでなく、28章の最後には、栄光と威厳に満ちた、天地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示して、神の永遠からの配剤の確かさをユダヤ人たちに知らせようとした。

あなたに取って、主イエス・キリストはどのようなお方として、心におぼえられているでしょうか?「ナザレのイエス」でしょうか、「天においても地においても一切の権威を授けられた」栄光の主でしょうか?

 

2017 6 18 마태복음 2:13-23 애굽으로 피하여

 

서문) 주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생명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헤롯왕의 왕위를 노리는 유대왕의 탄생이라는 오해로 인해 대량학살을 당하는 위기의 대상이 된 것이었습니다. 요셉 일가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구세주로 보내신 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굽을 쓰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400년간 노예생활을 보내던 선택하신 민족을 구하기 위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신 사명을, 아기 예수를 쓰셔서 신약시대에 특히, 이스라엘의 말씀을 읽고 있던 자들에게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마태는 메시아∙예수의 유아시절을 그리는 것으로 동포들에게 이것을 이해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Ⅰ 13-15 애굽으로 피하여

 이 사건은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여 방문하고, 예배한 일로 발생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방문해 오지 않았다면 예수와 요셉, 마리아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들이 찾아오기까지 예수는 안전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까지 예수님은 민중들로부터 이스라엘의 왕 만세 ∙호산나라는 환성을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에 천사로부터 갑자기 어린 예수의 위기를 들었습니다. 헤롯이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는 계획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적대하는 자들의 교회에 대한 잔악한 계획, 의도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앗시리아 왕 산헤립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나를 거스려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이사야37:28)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부터 이토록 위험에 빠지고 어려운 환경에 놓이셨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태어날 때부터 「온 세계에서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다. (예레미야15:10) 예수님의 교회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으나」(시편129:1,2) 하나님은 이 곤란들을 알고 계십니다. 이 곤란에 대처해 주십니다. 애굽으로 피하라. 예수님이 성장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을 때,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마태복음10: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 곳에 줄곧 남아있는 것만이 아니라 피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훌륭한 점은 말씀을 듣고 그 날 밤 즉시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난 것입니다.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여행의 준비도, 새로운 땅에서의 생활에 대한 불안도 생각할 여유없이, 「일어나서」, 「밤에」 떠났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전에 하나님께 순종했던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떠났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요셉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포기해야 하거나, 남겨두고 떠나야 할 재산이 없었습니다. 사람에게 위기가 닥치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얼마 안됩니다. 더욱이 천국에 들어갈 때에는 자신의 몸 뿐입니다. 선교자들이나 그의 가족들도 단신으로 이동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비결 중의 하나는 많이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째서 애굽이었을까요? 마태는 호세아 예언의 성취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호세아11:1「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이 예언은 「내 아들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애굽에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셔서 백성들을 구출해셨습니다. 이 일로부터 호세아 시대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곳에서 다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내 아들」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으로 피하여」라고 천사는 말했습니다. 실제로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400년간 노예생활을 한 곳입니다. 우상숭배, 전제정치, 장자가 하나님의 천사에게 죽임을 당한 원인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증악한 행동을 한 잊을 수 없는 곳, 모세가 탄생했을 때 이스라엘의 남자아이가 죽임을 당한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하나님은 최악의 장소에서 아들 예수를 피난시키려 하셨습니다. 최악의 장소에서 하나님은 최선의 목적을 달성시키려 하셨습니다. 아들이 탄생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내린 하나님의 말씀은 믿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이전에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시험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한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시 일어나서 그들은 밤에 떠났습니다. 우리들의 계약의 자녀가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주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에 겪으신 일을 기억합시다.

구세주 되신 아기를 이스라엘의 어떤 곳도 안전하게 받아들일 곳은 없었습니다. 애굽밖에 없었다고 하나님은 판단하셨습니다. 유다에서 쫓겨난 그리스도를 애굽은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구세주의 구원의 확장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달도록 외친 후, 복음은 전세계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Ⅱ 16-18

 동방의 박사들이 떠난 후, 헤롯왕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사들이 돌아오면 아기 예수가 있는 곳을 알려줄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새로운 왕을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습니다. 헤롯은 격노했습니다. 「심히 노하여」 낙담과 절망과 분노는 점점 커져갔습니다. 심한 집념으로 부정행위를 해온 죄는 점점 더해져갔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새로운 왕의 생명을 확실하게 없애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근처의 2살이아의 남자아이를 한명도 남김없이 죽였습니다. 정치력이 악을 위해 오용되었습니다. 헤롯왕은 에돔 출신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증악은 그의 뼈 속까지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다윗에 대한 노여움으로 인해 사울왕의 명령으로, 에돔사람 도엑은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전부 죽였습니다. (사무엘상22장) 85명에 달했습니다. 비인간적 수단을 이용했습니다. 헤롯왕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통치한 모든 기간에 있어서 잔악했습니다. 전제군주의 명령이면 무고한 어린아이라도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프스의 「유대고대사」에 의하면 헤롯은 자신의 자녀도 3명을 죽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헤롯은 그 후에 유대 국회의원전원을 처형시켰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헤롯이 70세경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2세의 어린아이가 성장해 자신의 지위를 뺏으려 한다는 망상에 빠졌습니다. 거만과 잔인한 짐승과 같은 욕구를 즐기기 위해 살인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2 살인명령의 범위는 「베들레헴」 뿐 만 아니라 「그 모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너무도 심하게 확장된 범위였습니다. 동시에 이 아이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박해받아 순교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것이라면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받게될 대우는 결코 무익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마태복음21:16)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어린 아이들이 「다윗의 자손 호산나」라고 외친 것으로 인해 제사장, 율법학자들의 항의애 대해 대답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세주를 위한 아기, 어린 아이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늘에서는 찬미는 어린아이들로부터 바쳐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이 예언은 예레미아 시대에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후, 포로가 된 백성들을 라마에 끌어와서(예레미아40:1), 칼로 쳐죽이고, 포로로 삼거나 그의 하고 싶은대로 처우했을 때 일시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베들레헴까지 들려왔습니다. 이 두 개의 마을은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다시 성취되었습니다. 지금은 베들레헴에서 라마에 들렸습니다. 베들레헴은 베냐민을 낳은 뒤 라헬이 죽어 묻힌 곳입니다. 그곳에 무덤이 있었습니다. 라헬의 자손은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가진 어머니도 라헬과 같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 이러한 대고난을 인간에게 실감케하는 것은 성경의 시대만이 아닙니다. 현대의 전쟁지역, 분쟁지역의 어린 아이들이 희생이되어 부모들의 통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스라엘의 위로가 될 메시아가 이러한 비극을 맛보게 하는 것으로 세상에 소개되어도 괜찮을까요? 이것은 있을 만한 일로 성경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해서 성경은 성취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태는 동포들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것에 걸리지 않도록, 더욱이 예레미아서를 읽어보면 이 일은 더 이상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의 서곡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31:16-17「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사태는 최악입니다. 하지만 회복은 신속하게 진행됩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이사야9:6) 덕분에 사람들이 잃은 것은 충분히 보상받게 됩니다.

 

Ⅲ 19-23  

1 하나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헤롯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BC4년경으로 추측됩니다. 애굽은 잠시동안의 거주지였습니다. 몸을 피할 곳은 되었지만, 영주하여 살 곳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라고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10:6)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돌아다니는 것은 생각해볼 만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곳에 여러분을 두고 계시는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예수와 가족을 보호하신 하나님은 지금은 이스라엘로 돌아오도록 명하시고, 그 곳에서도 관계를 소중히 하셨습니다.

「아켈라오」는 아버지의 왕국 중 남부만을 상속받았습니다. 아버지 헤롯을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AD6년 실정으로 면직되었습니다. 「갈릴리」는 아켈라오의 이복형제 헤롯∙안티파스에게 지배받았습니다. 메시아를 양육하는 데에는 훨씬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마태는 성경의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갈릴리」의 나사렛에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을 때에 나사렛에 살고 있었슴(누가복음1:26,27)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사렛」은 요셉, 마리아에게 있어서 친구들도 많이 있으며, 친족도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일가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절호의 장소였습니다. 이로써 구세주는 「나사렛 예수」라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23절) 이 곳은 여러 오해가 생기는 어려운 곳입니다. 먼저 「선지자」로 복수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선지자 한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명백하게 쓰인 것이 아닙니다. 몇몇의 예언이 결부시켜 의미를 알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입니다. 마태는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로 「나사렛 주민」이라 말하려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라고도 말했습니다. 이것은 「나사렛 사람」 (원어:나조라이오스)은 부족한, 좋지않은 소문이 떠도는 작은 시골 출신이라는, 메시아가 사람들의 냉소 속에서 무시받으며 성장된 것을 말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53장에 메시아 예언등 복수의 예언이 연한 순 같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언제라도 말라버릴 것 같은 위험속에서 자라는 메시아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편 22편6,7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이사야53장2,3절「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스가랴11장2-11절, 등에 나오는 말씀이 예언의 성취가 되고있음을 마태는 말하고 싶어했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나실인」(원어:나질라이오스)(민수기6장) 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오해하지 않도록 합시다.

메시아가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에게서 어떤 좋은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존경할 가치도 없습니다. 경멸받을 만한 가치의 이름이었습니다.

 

맺음) 마태는 구약성경의 메시아 예언대로 탄생하신 아기 예수가 받으신 대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28장 마지막 부분에는 영광과 위엄에 가득 찬, 천지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원하고 변치않는 배려를 유대인들에게 알리려 했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으로 마음에 기억하고 있습니까? 「나사렛 사람 예수」입니까? 「하늘과 땅에 있어서 일체의 모든 권위를 갖으신」 영광의 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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