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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年10月7日 礼拝説教 朴柱炫教師候補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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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年10月7日主日礼拝
説教題:きよい心と正しい良心と偽りのない信仰
聖書:第一テモテ1:1−7

1.パウロとテモテ

テモテへの手紙はパウロがテモテに送ったものです。彼はエペソ教会の責任を持っている若い牧会者でした。彼のお父さんはギリシャ人で、お母さんはユダヤキリスト者です。彼はルステラ出身でした。彼は幼い時からお母さんとお祖母ちゃんから聖書を習いました。彼は少し体が弱かったし、消極的な性格でした。しかし、彼はパウロの立派な弁論者でありメッセンザーでした。彼とパウロとの初めての出会いは第一宣教旅行の時、パウロがルステラを訪問した時でした。パウロが第二宣教旅行の途中、再びルステラを訪問した時にはともに宣教旅行をすることを誘いました。テモテはパウロがマケドニヤとアカヤで福音を宣べ伝える時に手伝いました。パウロが3年間エペソで働いた時も共にいました。テモテはパウロと共にエペソからマケドニヤへとコリントへ、また、マケドニヤから小アジアへ旅行しました。テモテはパウロがローマで最初に獄に閉じ込められた時も共にいました。そこから解放された時も共に旅をしました。ついにテモテはエペソに滞在し、エペソにある教会を牧会しました。その時、テモテがパウロからの手紙をもらったのです。パウロの取ってテモテは生死と苦楽を共にしたかけがえのない存在でした。ですから、パウロは2節で信仰による真実のわが子テモテだと呼んでいます。パウロは1節で、私たちの救い主なる神という言葉から始めています。パウロは最初のところに「私たち」という言葉を意図的に使っています。それは神様はパウロ自身だけではなく、すべての聖徒を救って下さる方であることを強調するためです。手紙の初めから神様の普遍性と偉大さを強調しているのです。続けてパウロは自分をキリスト・イエスとの命令による、キリスト・イエスの使徒パウロだと紹介しています。初代教会ではイエス様と共に生活した弟子たちが使徒と呼ばれました。後になって使徒はイエス様の生活と死と復活を宣べ伝えることが出来る人に拡大されました。パウロはここで使徒的な権威を持ってテモテに自分に与えられた使命を忠実に果たすことを励ましています。使徒という呼び方はパウルだけではなく、当時、12弟子以外にも福音宣教の働きに関わったバルナバ、テトス、アポロ、シラス、テモテにも同一に使えました。しかし、それは一世紀の教会で現れたことでその後には無くなりました。最近、広がっている新使徒運動という名での神秘主義的な動きでは自分が預言者で使徒であると話す人々が現れています。皆さんがそのような人に会ったことがあったり、これから会うかも知りませんが、気をつけるべきです。聖書的ではありません。もちろん、今日も預言者的な働きと使徒的な働きはあるし、必要です。しかし、聖書が完成された今日は旧約聖書と新約聖書に書かれたいるような預言者と使徒はありえないことです。2節ではパウロは父なる神と私たちの主なるキリスト・イエスから、恵みとあわれみと平安とがありますようにと挨拶しています。パウロは他の書信と違う表現であわれみを付き加えています。そのあわれみとは神様が人間の全ての状況を支配し、限りない愛と慰めを謹んで下さることです。あわれみは罪人たちを苦しみから救ってくださり、常に新たにすることです。恵みは神様からの値ないの救いの贈り物です。平和は罪人が神様からもらった恵みの結果です。パウロはそのようにテモテとエペソ教会の働きを覚え祝福し祈っています。私たちもこのように神様の一方的な恵みと限りないあわれみによって平和をもらっているのです。私たちに恵みとあわれみと平安を下さった神様に感謝しましょ。

2.違った教えと空想話と系図

ローマの獄から解放されたパウロはテモテとクレテ島を通り過ぎ、エペソまで同行しましたが、テモテをエペソに残してマケドニヤに行きました。パウロがマケドニヤに出発するとき、テモテにお願いしてテモテをエペソに残すようにしました。それはテモテが共にマケドニヤに行きたいとお願いしたからです。それで、パウロはテモテに残ることを切にお願いしました。エペソ教会にある人たちが違った教えを説いしたからです。パウロが命掛けて伝道したエペソ教会にキリストの福音以外に違った教えにより教会に問題が起こったのです。この違った教えは偽りの教えで、正しい教えとは違う異端的な教えであります。それは初代教会には既に公の正しい教えである教理があったことを推測出来ることです。その違った教えは果てしのない空想話と系図であります。パウロはそれらに心を奪われたりしないように命じています。ユダヤ人の中にはすべての物に霊があると考えているグノーシス主義がありました。このグノーシス主義者たちとユダヤ教の学者たちは系図を大切にするユダヤの文化の中で神様と人間の間には限りない系図があると考えました。それで旧約人物たちに対する仮想的な系図を勝手に作りました。特に、アブラハムとモーセ、大祭司たちを中心に系図と伝記を作り、個々の自分たちが彼の子孫であるとしました。それは教会の中で終わりがない論争を起こしました。それで、彼らは自分たちは知識者だとし、高ぶって一般の信徒たちはわけが分からない複雑なものに変えてそれを強調しました。教会はそれによって争いが起こり、大変なことになりました。パウロはそれが論議のための議論を引き起こすだけでなので、信仰による神の救いのご計画の実現をもたらすものではありません。と堅く命じています。彼らの論理は形だけは聖書的で霊的なもので神秘的なもので人々を惑わすようにしていました。それによって人々も惑わされたのです。その対象は信じていない人々ではなく、教会に集まって信じる人々でした。今日も教会に集まって信じる人々に対する偽りの教えや異端の働きが活発です。その特徴は自分もしらない内に巻き込まれることです。蛇がエバを誘惑した時と同じく、ほんの少しだけ御言葉を変えながら誘惑します。そこからどんどん流されるのです。初代教会に大きな問題になった異端であるグノーシス主義をもう少し考えたいと思います。グノーシス(Gnosis)という言葉の意味は、ギリシャ語で「知」あるいは「認識」を意味します。主な特徴は自己救済による神との合一、すなわち人間の理性よる認識が大切で、聖書より新しい知識が求められ、それによる自己救済に救いが強調されています。聖書を自分がどのように認識するかが大切で、それは聖書の権威のより自分が判断の基準であることを意味します。自分がどのように感じたか、認識したかが基準です。それは神中心ではなく非常に人間中心であるのです。また、二元論でありイエス様の人性と神性が区別されていると主張しました。イエス様は真の神様でありますが、真の人間ではないと霊的な存在のみを認めました。旧約の神様と新約の神様は違う方であると考えました。その思想は三位一体教理の論争の中で一番大きな異端であると指摘され、教会により徹底的に弾圧されて歴史の中に忘れられました。しかし、その思想は様々な影響を残して20世紀に再び形を変えて発展しました。今日の教会に巧妙にその影響を拡大しています。それが啓蒙主義と神秘主義が混ぜた形でわけが分からないものになっています。ある人たちは聖書は旧い時代のためのもので、今は新しい霊的な時代です。そのために私たちには新しい知識である預言、夢、幻、トレンスが必要であり、それを求めるべきだと主張しています。自分の内の光を求めることが大切であると主張しています。それはグノーシス主義です。また、神様は自分の御言葉より偉大な方です。何でも出来る方です。ですから神様の働きを限ることをしないで下さい。その偉大さは時代によって進化していることで御言葉(聖書)を超えることです。ですから、新しい預言と幻が必要です。この世は終わりに近いので神様が特別に世界中から預言者と使徒を起こしています。だと巧妙に聖書の正当性を崩そうとしています。完成された聖書は誤りのない完全な霊感により書かれた神様の御言葉です。そこには何が加える必要は全くありません。イエス様さえも書かれ御言葉に従って働きを進んだことは今日、世界の教会の色んな動きが明確に非聖書的であり、とんでもないのかが分かります。

3.きよい心と正しい良心と偽りのない信仰

パウロは5節で神様の御言葉を教える教師は信徒たちが誤った異端の教えに惑わされないように注意をすることを命じています。その勧告の動機はきよい心と正しい良心と偽りのない信仰とから出て来る愛である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きよい心と正しい良心との意味は道徳的にも霊的にも神様を認識することと神様の前に自分があることを認めることで、神様の前に聖く生きることにより生じる自由と大胆な行動と関連しています。また、偽りのない信仰とは自分の権利と利益のためではなく、真実な心を持って信じている信仰を意味します。そこから生まれる愛を持って人々に勧告することだとパウロは教えています。いくら信仰的で良さそうに見えてもバランスを持つ愛の行動が必要です。熱心に信仰生活することは良いことですが、それを他の人と比較したり判断することは良くないです。また、お互いに勧める時がありますが、何を宗教的にしている、してないことではなく、自分が本当に神様の前にきよい心と正しい良心と偽りのない信仰による愛で行動しているかを確認する必要があります。そうではない場合はまず自分が神様にふさわしく歩むことが最優先です。そして、他の兄弟たちのためには静かに祈りながら彼らの内に働いている神様の働きを信頼することです。自分から始めた働きと神様が始めた働きはその実を見れば分かります。いくら宗教的で良いものであっても聖霊の実が自分も他の兄弟も結ばない働きはやめるべきです。当時の偽りの教師たちは無駄な神学論争を起こしたりして、自分の論理の転換により律法先生になろうとしました。それによって自分の権威を高めようとしました。しかし、彼らの言う言葉はむなしいつぶやきであったと6節を見ると分かります。彼らの言ってるのは聖書から始まったもので、神秘的であり、当時流行ったものです。彼らにとってはそれが主の御心だと堅く信じていたでしょう。しかし、彼らはきよい心と正しい良心と偽りのない信仰による生き方ではなく、そこから遠く離れた空しい無意味な言葉だけを並んでいるのです。パウロはその空しい高慢を指摘しています。聖書の奥義を知らない者の特徴は聖書を勝手に解釈し、それに対するものを並ぶことが好きな人です。結局、そのような過ちを犯すのです。きれいで甘い言葉で霊的なムードを現すことを好みますが、自分が言ってることの意味をほとんど分からない人です。自分が言ってる、また確信を持っていることも本当は全然分かっていないです。それは私たちも落ちる可能性がある信仰の穴です。一部の人を除き、だいたい長く話す人は自分が言ってることをほとんど分かっていないことと同じです。
4.結論

私たちが生きているこの時代はパウロが警告していること以上に困難な時代です。私たちはきよい心と正しい良心と偽りのない信仰とから出て来る愛を持って人々に仕えられる者になり、偽りの異端的な教えから自分と兄弟たちを守る必要があります。また、わけが分からない無駄な高慢な信仰を悔い改める必要があります。私たちは聖書の奥義を知らないのに 聖書を勝手に解釈し、それに対するものを並ぶことが好きな人にならないためにはどうすれば良いですか。また、宗教的行動ときれいな言葉を使って、人々に霊的なムード現れることで、自分のむなしい高慢を隠し、人々をコントロールしたい欲望から解放されるためにどうすれば良いですか。それは神様の前に生きることです。すなわち、十字架の前に生きることです。十字架の前には自分の汚い罪があります。見たくもないし、触れたくない本当の自分がいます。神様の恐ろしい怒りで永遠に滅びに向かった惨めな存在である自分がいます。十字架の前では涙が零れ止まらないし、胸が痛みを感じるまでたたいて、たたいても、顔を上げることも出来ず恥ずかしくてどうすればいいか分からない自分がいます。救われるための資格も価値が一切ない者で自分しか考えない冷たい者で、そんな自分自身さえも愛することが出来ない者のためにイエス様の十字架があります。私たちは自分の全財産と全てを支払い、一生をかけでも返すことが出来ない大きなイエス様の愛の借金があります。その愛の借金をイエス様と他の人々に返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すみません、私にはあなたには返さなければ愛の借金があります。どうすれば返すことが出来ますか。という心で人々に仕えるのです。それゆえ、自分がちょっとだけ出来ることがあるからといって兄弟たちを上からの目線で見ることはとんでもないことで、とんでもない高慢です。皆さんは今何を頼り、誇りだと思っていますか。いい仕事ですか。いい学歴ですか。お金ですか。いい家ですか。いい家族ですか。勉強ですか。才能ですか。それらのものがどれぐらい保つことが出来るんだと思いますか。全ては過ぎ去りますが十字架のイエス様だけ永遠です。その永遠は今の私たちの現実とつながっています。十字架のイエスに命掛け従いませんか。ただ、十字架だけを誇りましょう。そこに私たちの救いがあり命があります。十字架なしにそれがいくら良い成果をあげ、益になることであってもそれは空しいことであり、祝福ありません。その十字架の恵みによって生きる新たな日になりますように。

お祈りします。

2012년 10월 7일 주일예배 – 디모데전서 1장 1절-7절            카이힌 마쿠하리 은혜교회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

1.바울과 디모데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의 책임자로 있는 젊은 목회자 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으로, 어머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루스 드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는 약간 몸이 약했고 소극적인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의 훌륭한 변론이자 메신저였습니다. 그와 바울과의 첫 만남은 첫 선교 여행 때 바울이 루스 드라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바울이 두 번째 선교 여행 도중 다시 루스 드라를 방문했을 때는 함께 선교 여행을 하는 것을 권유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도왔습니다. 바울이 3 년간 에베소에서 일한 때도 함께있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서 마게도냐로 고린도에, 또한 마게도냐에서 소아시아로 여행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로마에서 처음으로 감옥에 갇힌 때도 함께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풀려났을 때도 함께 여행을 했습니다. 마침내 디모데는 에베소에 머물면서 에베소에있는 교회를 목회하게 됩니다. 그때 디모데가 바울의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바울의 곁에 디모데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 둘도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2 절에서 믿음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1 절에서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는 말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시작 부분에 “우리”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바울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편지의 처음부터 하나님의 보편성과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계속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 한 제자들이 사도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사도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전파 할 수있는 사람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사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디모데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는 것을 격려합니다. 사도라는 호칭은 바울뿐 아니라, 당시 12 제자 이외에도 복음 선교 사역에 관련된 바나바, 디도, 아폴로, 실라, 디모데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1세기의 교회에서 나타난 것으로 그 후에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다른 교훈과 신화와 족보

로마의 감옥에서 풀려 난 바울은 디모데와 크레타 섬을지나 에베소까지 동행했지만,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고 마게도냐에 갔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로 출발할 때,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남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가 함께 마게도냐에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남아있는 것을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에베소서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가르침을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목숨을 걸고 전도 한 에베소 교회에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의 다른 가르침에 따르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다른 가르침은 거짓 가르침 즉 올바른 가르침 과는 다른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초대 교회는 이미 공공 올바른 가르침 인 교리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른 가르침은 끝이 없는 공상 이야기와 족보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거나 하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유대인 중에는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가 있었습니다. 이 영지주의자들과 유대교의 학자들은 족보를 소중히 하는 유대인의 문화속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끝없는 족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약 인물들에 대한 가상 족보를 마음대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과 모세, 대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족보와 전기를 만들고 각자, 각자 자신들이 그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끝없는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은 지식 자라 하고 교만하여 일반 신도들 에게는 이유를 모를 정도로 복잡한 것으로 바꾸어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통해 싸움이 일어나고 어지러워 졌습니다. 바울은 그것은 논쟁를 위한 논쟁만을 일으킬 뿐이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실현을 가져올 것은 없습니다. 라고 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겉모습은 성경적이고 영적인 것이며, 신비한 것으로 사람들을 미혹 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현혹 된 것입니다. 그 대상은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는 교회에 모여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도 교회에 모여 믿는 사람들에 대한 거짓 가르침과 이단의 활동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자신도 잘 모르는 가운데 빠져들 수 있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 할 때와 마찬가지로 잘 모르는 말씀을 아주 조끔만 바꾸면서 유혹합니다. 거기에서 점점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큰 문제가 된 이단인 영지주의를 좀 더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지주의(Gnosis)라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어로 “지”또는 “인식”을 의미합니다. 주요 특징은 자기 구제는 하나님과의 일치, 즉 인간의 이성에 따르는 인식이 중요하고 성경보다 새로운 지식이 요구되며, 그에 따른 자기 구제에 따른 구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신이 어떻게 인식 하느냐가 중요하며, 그것은 성경의 권위보다는 자신이 판단의 기준임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느꼈는가? 인식했는지가 기준입니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매우 인간 중심 인 것입니다. 또한 이원론이며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구별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입니다 만,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고 영적인 존재만 인정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상은 삼위 일체 교리 논쟁 중 가장 큰 이단이라고 지적, 교회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되어 역사 속에서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상은 다양한 영향을 남기고 20 세기에 다시 형태를 바꾸어 발전했습니다. 오늘의 교회에 성공적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계몽주의와 신비주의가 혼합 된 형태로 그 실체를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은 낡은 시대를 위한 것으로, 지금은 새로운 영적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지식이나 예언, 꿈, 환상, 변화(트랜스포메이션)가 필요하며, 그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신 안의 빛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지주의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보다 위대한 분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을 하지 마십시오. 그 위대함은 시대에 따라 진화하고 있는 것으로 말씀 (성경)을 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예언과 환상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끝날에 가깝기 때문에 하나님 께서 특별히 전세계에서 선지자와 사도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라고 교묘하게 성경의 정통성을 무너뜨리려고 있습니다. 완성된 성경은 일점의 오류가 없는 완전한 영감에 의해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더 이상 무엇을 추가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 조차도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 교회의 여러 가지 움직임이 명백하게 말씀에서 떠나 있으며, 비 성경적이며, 터무니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

바울은 5 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는 신도들이 잘못된 이단의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 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 권면의 동기는 맑은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에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의미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도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사는 것으로 생기는 자유와 담대한 행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거짓없는 믿음은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 한 마음으로 믿고있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적이며 좋아 보여도, 균형있는 사랑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또한 서로 권면할 때가 있습니다 만, 종교적으로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나온 사랑으로 행동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우선 자신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면서 그들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신으로 부터 시작된 일과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종교적이고 좋은 것이라도, 성령의 열매가 자신도 다른 형제에게 맺히지 않고 분쟁이 일어나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합니다. 당시의 거짓 교사들은 쓸데없는 신학 논쟁을 일으키기도하고, 자신의 논리의 전환에 의해 율법 교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헛된 말이라고 6 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비적이며, 당시 유행 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으로의 삶보다는 거기에서 멀리 떨어진 허무 하고 무의미한 말만 늘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허망한 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의 특징은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그에 대한 잡지식을 늘어 놓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런 실수를합니다. 깨끗하고 달콤한 말로 영적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을 좋아하지만, 자신이 말하고있는 일의 의미를 거의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말하고, 또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은 전혀 알고 있지 않는 상태 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빠질 수 있는 신앙생활의 구멍입니다. 특정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체로 길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4.적용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는 바울이 경고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우리는 정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겨는 사람이 되고, 거짓 이단적인 가르침에서 자신과 형제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또한 도무지 알기 힘들게 하는 쓸모없고 교만한 신앙을 회개해야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비밀을 모르면서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거나 그에 대한 지식을 늘어 놓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또한 종교적인 행동과 달콤한 말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영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의 헛된 교만을 숨기고 사람들을 컨트롤하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 대답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는 자신의 더러운 죄가 있습니다. 보고 싶지도없고, 만지고 싶지 않은 진짜 자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에서 영원히 멸망을 향했던 비참한 존재인 자신이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려서 멈추지 않고, 가슴이 통증을 느낄때까지 두드리고, 두드려도 얼굴을 올릴 수도 없고, 부끄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자신이 있습니다. 구원의 자격도 가치도 전혀없는 사람, 자신 밖에 생각하지 않는 차가운 사람, 그런 자신조차 사랑할 수없는 자기를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 재산과 모든 것을 지불하고 평생을 바쳐서라도 갚을수 없이 큰 예수님의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그 사랑의 빚을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에 갚아야만 합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갚아야만 하는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무언가를 조금 할 수 있다고 해서 형제들을 위에서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못하는 것이고, 터무니없는 교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자랑하고 있습니까? 좋은 직장입니까? 좋은 학벌입니까? 돈입니까? 좋은 집입니까? 좋은 가족입니까? 공부입니까? 재능입니까? 그 것이 얼마나 유지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모든 것은 다 지나가 버리지만 십자가의 예수님 만은 영원하십니다.

그 영원은 지금 우리들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 목숨 걸고 따르지 않겠습니까? 오직 십자가만 자랑합시다! 거기에 우리들의 구원과 생명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그것이 아무리 좋은 성과를 거두고, 이익이 되는 경우에도 그것은 허무한 것이고 축복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새로운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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