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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年11月23日 礼拝 説教(日本語文、韓国語文)

2014年11月23日 礼拝音声

 

2014年11月23日 詩篇15篇 「聖なる山に住む人」

序文)詩篇14篇が 生まれながらの人間の愚妄と無神論とを示したとすれば、この15篇は霊的な人間を示している。ダビデは、聖書が教える真の礼拝のある部分に焦点を合わせて、当時のイスラエルの偽りの礼拝者たちに挑戦している。神は日常生活において、改善と聖潔なしに、すなわち倫理的な反省なしに臨む者に対して、大切な原則を提示している。

15篇全体の構造:先ず質問があります。次ぎに応答がつづきます。2節に一般的要約、それから3-5節に交互に否定と肯定の文によって答えが詳しくあり、1節への最後的応答で終わりになります。

 

ダビデの賛歌

1  主よ。だれが、あなたの幕屋に宿るのでしょうか。だれが、あなたの聖なる山に住むのでしょうか。

「主よ」エホバよ。このエホバは、名前です。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の、契約を守る神を意味します。三位一体の契約を立て、守りともう神に向かってダビデは、神の臨在のみもとに入り、住むものの資格について、質問を直接、主にしています。

「幕屋」は①普通の天幕か、②櫃を覆い、またモーセによって命じられた贖いの犠牲と供え物とによって、主がそこで民と会見される集会の天幕、即ち幕屋かのどちらかです。「聖なる山」シオンの山でエルサレムにある聖なる場

「宿る」は普通、一時お客として滞在するのを意味する語。「住まう」は家に住んでいる者の、もっと永続的な居住を表す語。主の家における私たちの永遠の交わりと安泰さとに関係した表現。

まずエルサレムの丘の上に立つ小さなテントに集中された神様礼拝という地域的な面をみて質問している、次ぎに信仰によって高く越えた天にある普遍的な礼拝に舞い上がり、そこに住むのは誰ですか?と問うている。

今日的にいうと、地上に有る教会の交わりに入るに価するのは誰なのですか。誰が正当にキリストの教会に宿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さらに絶対的な意味で、永遠のご臨在に与って、永遠から永遠まで幸せと安らぎの中に、あなたと住うことのできるのは誰ですか。

誰が・・人格をさしています。私たちは、自分についての検討を、誰がという導入によってさせられます。ダビデは神の前でのこのような自己検討をせまるために詩篇を詠んだのではないかと思わせます。

2  正しく歩み、義を行ない、心の中の真実を語る人。

「正しく」必ずしも無罪であることではなく、完全に任せきった、宗教生活を意味する。神様に対する完全な、絶え間ない、割引なしの信頼・明け渡しを意味する。

応答2-5節 ① あらゆる真の礼拝者は巡礼者である。私たちはこの世にいつまでも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へブル11:9「 信仰によって、彼は約束された地に他国人のようにして住み、同じ約束をともに相続するイサクやヤコブとともに天幕生活をしました。彼は、堅い基礎の上に建てられた都を待ち望んでいたからです。その都を設計し建設されたのは神です。」全ての信仰者は目指すべき天の御国に向かって地上の生活を巡礼者として歩んでいます。毎週の礼拝に来るとき、永遠の御栄えの中にある神の都を目指して、その祝福に入れていただくことを確信して守ります。この世では一時的で本当の憩いに入るのは天の永遠である事を知っています。

② 真の礼拝者の性格はその足、手、心によって示されます。彼が何であるかは、彼が何をするか、何を語るかによって知られるのです。ここで言っているのは「神への敬虔」さです。

私たちの性格はどうでしょうか。わたしは罪深いと言う以外に何も神様に言うべき事はありません。足も手も心も、思いはかる所は常に罪ふかいのです。主イエスによる恵みがなければ誰も、神の前に立ち通すことができません。

このような詩篇を書いたダビデも後にその罪深さを示して、神からの裁きと悔い改めと再生をいただく必要があったのです。

詩人はいいます。心の中で真実を語る。人の心の内で考えることがその性格の根源です。真の礼拝者は、神と人にたいして、心の中で絶対に誠実で正直です。内的な誠実さは正しく歩み、義を行わせる。そのような歩みが可能でしょうか。聖霊なる神への信頼、身をゆだねることから可能となります。

3  その人は、舌をもってそしらず、友人に悪を行なわず、隣人への非難を口にしない。

悪口を運んで「歩きまわる」おせっかい屋さんを表す語が用いられており、これは「足」からきている。「持ち上げる」口にしないと訳されている。善い人は、隣人の背に荷負わせようと罵倒の重荷を持ち上げないと言うことを意味する。理想的礼拝者は毎日自分の舌をコントロールする事をこころがけています。それが実際にどれほど困難か、ヤコブが警告して書いています。「同様に、舌も小さな器官ですが、大きなことを言って誇るのです。ご覧なさい。あのように小さい火があのような大きい森を燃やします。 舌は火であり、不義の世界です。舌は私たちの器官の一つですが、からだ全体を汚し、人生の車輪を焼き、そしてゲヘナの火によって焼かれます。どのような種類の獣も鳥も、はうものも海の生き物も、人類によって制せられるし、すでに制せられています。しかし、舌を制御することは、だれにもできません。それは少しもじっとしていない悪であり、死の毒に満ちています。 私たちは、舌をもって、主であり父である方をほめたたえ、同じ舌をもって、神にかたどって造られた人をのろいます。 賛美とのろいが同じ口から出て来るのです。私の兄弟たち。このようなことは、あってはなりません。」(ヤコブ書 3:5-10)。

「その人は、舌をもってそしらず、友人に悪を行なわず、隣人への非難を口にしない。」これは、愛です。愛は律法を完成させます。

 

4  神に捨てられた人を、その目はさげすみ、主を恐れる者を尊ぶ。損になっても、立てた誓いは変えない。

「捨てられた人」遺棄者。この語は、溶ける、膿が醜悪なただれ口から身体の外ににじみ出てくる様ににじむ、からきている。捨てられた者はその性格が非常に下劣で、神様も人も、むかむかして投げ捨てる、そういう者。つまり捨てられた者は社会から掃き出される膿のようなもの。

③ 理想的礼拝者の目 明敏なる眼識の必要。道徳的遺棄者をさげすみ、主を畏れる人を尊ぶ人はまことのクリスチャンです。何故ですか。非常にしばしば、邪悪なまでに放蕩な者たちが、この悪しき世で有力な地位にあるのです。世は彼にへつらい、私たちも彼らが下劣であるとしりつつも、彼らを褒め称えるようにと度々誘われます。他方、神の聖徒たちは、弱々しくみられ、貧しく、世にさげすまれます。つまらない、お粗末な民衆です。それで誘惑はキリストがそのような者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にもかかわらず、さげすむ様な振る舞いに及ぶのです。富める有力なものは尊ばれ、その罪は見過ごしにされ、大目にみられます。貧しい、忠実であるが何かパットしない聖徒たちは押しやられてしまうのです。神はこのような盲目に怒られるのです。

④ 言葉 仕事に不正直。状況が自分に悪くなると契約を簡単に破棄して相手に多大な損害を平気でかける。約束に従って行動しぬく事は大切です。自分の誓う所は守る必要があります。

 

5  金を貸しても利息を取らず、罪を犯さない人にそむいて、わいろを取らない。このように行なう人は、決してゆるがされない。

「高利」を表す語は、「咬む」という元との意味を持っている。それは金貸しの金欲が貧しい者の肉へ食い込むかみ傷のようだからです。15篇には「ない」(ロー)というへブル語の不変化詞が七度でてくる。六度は正しい人がしない事柄に対してです。七度目は、決してゆるがされない。揺ぐ、震う、倒れ墜ちる。

⑤ 理想的礼拝者の仕事の処理は正しくなくてはなりません。 利息は旧約聖書で、ユダヤ人が外国人を扱う場合以外は禁じられていました。申命記23:20「 外国人から利息を取ってもよいが、あなたの同胞からは利息を取ってはならない。それは、あなたが、はいって行って、所有しようとしている地で、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の手のわざのすべてを祝福されるためである。」それは普遍的に非難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中世教会はそれを一般に禁止した。宗教改革時代は、不正搾取でない場合は、利子を正当としました。「それでも、一方の側が他の側の損失によって利益をえようと不当に努めるような全ての取引は、どのような名称がそれに与えられようと、非難されている事を覚えよ。」一切の人間的な権利の上に横暴に乗りまたがり、望みのない貧しい者をかすめ奪う略奪、無情な資本主義は、聖書に従っていませんし、宗教改革者たちもそういう態度を寛恕しなかった。聖書の教えは絶対公正と愛です。いかなる社会体系においても、人間の罪は弱者を犠牲にして利益を得ようとするものです。神はそのような貧しい者をかすめ奪う者を御国に入れられない。

ここで最後に非難されている罪は、賄賂です。一番現代もあれやこれやで実施されている罪です。戦禍の中でも国境を越えるために賄賂が係官によって要求されているとの報道があるほどです。

 

結論 このように行なう人は、決してゆるがされない。

真の礼拝者として、主の倫理基準を保つ者は、神の聖い山に入って安全に住み、何一つとしてその永遠のめぐみから、彼をふるい落とし、また倒れ落としは決してしない。そのように歩めるには、ただただ恵みによってだけ生きるすべを与えられる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聖霊の私たちの内に働いてくださる聖化の働きが、日々の歩みを神を畏れて進ませるのです。

歴史上、ここで言われている様に歩んだ方は、ただ一人主イエス・キリスト様だけです。私たちは、大小全てのここにある罪を経験しつづけています。主イエスの罪の贖いの身代わりの死、以外に救い出される方法はありません。信仰によって変えられる日々を進む事です。

第一ヨハネ2:17「世と世の欲は滅び去ります。しかし、神のみこころを行なう者は、いつまでもながらえます。」

 

2014 11 23     시편 15   주의 성산에 거할

 

인간의 태어나면서 갖고있는 어리석은 생각과 무신론을 나타낸 것이 시편 14편이라면, 오늘 말씀의 15편은 영적인 인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참된 예배에 촛점을 마추어, 당시의 거짓된 이스라엘 예배자들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개선과 성결없이, 즉, 윤리적 반성없이 예배하려하는 자들에 대하여, 소중한 원칙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15편 전체의 구조: 먼저 질문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대답이 이어집니다. 2절에, 일반적 요약, 그 다음으로 3-5절에는 부정과 긍정의 문장으로 번갈아가며 대답이 자세하게 나오고 있으며, 1절에의 최종적 응답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다윗의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누구오니이까 1

「여호와여」 여호와여. 여호와는 이름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계약을 지킨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의 계약을 맺고, 준수하려 하나님께 향한 다윗은 하나님의 거하신곳에 들어가 유하게 될 자격에 대하여 하나님께 직접 질문하고 있습니다.

「장막」은 ①일반적인 장막인지 ②궤를 지고, 또한 모세로부터 명을 받은 속죄의 대속물로써, 하나님께서 그곳의 백성과 마주하신 집회의 천막, 즉, 회막 중 어느쪽입니다. 「성산」시온산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스런 장소

「유할」은 일반적으로 손님이 일시적으로 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 「거할」은 집에 살고있는 사람의, 계속적인 거주를 나타내는 말. 하나님의 집에 거함으로 얻게되는 하나님과 우리들의 영원한 교제와 안태를 나타내는 표현

먼저 예루살렘 성산위에 선 작은 장막에 집중된 하나님 예배라는 지역적인 면을 보고 질문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믿음으로 높은 곳에 있는 하늘의 보편적인 예배에 높이 떠올라,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은 누구인지 질문하고 있다.。

현재에 비추어본다면, 지상에 존재하고있는 교회에서 교제할만한 자는 누구입니까? 누가 정당하게 그리스도의 교회에 머물수 있을까요? 더욱이 절대적 의미로, 영원한 임제에 있어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행복과 평안함중에, 하나님과 함께 거할수 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누가∙∙∙인격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은 자신에 대하여 누가라는 도입을 통해 검침을 받습니다. 다윗의 시편은 우리들이 하나님앞에 이러한 자기검침을 하도록 시편을 읽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정직하게」반드시 무죄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맡긴 종교생활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완전함, 그치지않는, 거리낌없는 신뢰∙양도를 의미한다.

 

응답2-5절 ①진실한 예배자 모두가 순례자이다.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11:9「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모든 믿는자들은 천국을 향해 지상생활을 순례하는 자로써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주 주일날 예배에 올때, 영원한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 그 축복속으로 들어갈수 있음을 확신하고 지킵니다. 이세상은 일시적인 것으로, 참된 휴식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영원한 곳임을 알고 있습니다.

 

②참된 예배자의 성격은 그 발, 손, 마음으로 알게됩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무엇을 말하는지로 알게 됩니다.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경건」 함입니다.

우리들의 성격은 어떠합니까? 우리들은 범죄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외에 하나님께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습니다. 발도, 손도, 마음도, 생각할 수 있는 모든곳은 언제나 범죄한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통한 은혜가 없다면, 누구도, 하나님앞에 설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편을 쓴 다윗도 나중에 그 범죄함을 나타내고,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회개와 재생 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진실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이 그 성격의 근원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마음속에 성실하며 정직합니다. 내적인 성실함은 바르게 걷고, 의를 행하게 합니다. 그러한 걸음이 가능할까요? 성령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 자신을 맡기는 것에서부터 가능하게 됩니다.

3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나쁜말을 옮기며 「돌아다니는」참견장이는 나타내는 말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것은 「발」에서 온다. 「집어 들다」입에 담지않는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선한자는 이웃의 등에 짐을지우지 않는다라는 말을 의미한다. 이상적예배자는 매일매일 자신의 혀를 제어하기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힘든것인지 야고보가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야고보서3:5-10)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이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시킵니다.

 

4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망령된 자」유기자. 이 말은 녹다, 추악하고 문드러진 입에서 고름이 몸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처럼 번지는, 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망령된자는 그 성격이 대단히 비열하며, 하나님이나 사람이 울컥 치밀어 올라 던져버리는 그러한 자. 즉, 망령된 자는 사회가 쓸어버리는 고름과 같은 것.

 

③이상적 예배자의 눈  명민한 안목이 필요. 도덕적 유기자를 얕보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경하는 사람은 참된 크리스천입니다. 어째서일까요? 자악할 정도의 방탕한사람들이 이 악한 세상에서 유력한 지위에 있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엎드리고, 우리들도 그들이 열등함을 알면서도, 그들을 찬양하도록 자주 유혹을 받곤합니다.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의 성도들이 약하고 가난하게 보여 세상에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지루하고, 초라한 민중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러한 자들을 위해 죽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유혹은 깔보는 듯한 행동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부유하고 유력한 자는 존경을 받으며, 그 죄는 지나쳐버리고 곱게 봐주곤 합니다. 가난하며, 충성된지 어떤지도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성도들은 눌려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러한 맹목에 노여워하고 계십니다.

 

④ 말 일에 정직하지 못하다. 자신의 상황이 좋지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고 아무 거리낌없이 상대에게 커다란 상해를 입힌다. 약속에 따라 끝까지 행동하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자신이 서원한 장소를 지켜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5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고금리」를 나타내는 말은, 「깨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금욕이 가난한 자의 살을 깨물은 상처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15편에서는「아니하리이다」(로)라는 히브리어의 불행화사가 일곱번 나오고 있다. 여섯번째까지는 바른자가 하지않는 일들에 대해서입니다. 일곱번째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다. 요동하다, 쓰러지다.

 

⑤이상적 예배자의 일의 처리는 올바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금리는 구약성경에서 유대인이 외국인을 취급하는 경우 이외에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신명기23:20「타국인에게 네가 꾸이면 이식을 위하여도 가하거니와 너의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식을 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얻을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이것은 보편적으로 비난받게 되고 말았습니다. 중세교회는 이것을 일반적으로 금지했습니다. 종교개혁시대는 부정착취가 아닌 경우는 이자를 정당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한편이 다른 한편의 손실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얻으로 부당한 일을 한 모든 거래는 어떤명칭이 있어도, 비난받고 있음을 기억하라.」 일체의 모든 인간의 권리위에 횡포가 올라타고, 소망없는 가난한 자들을 노략하여 빼앗는 무정한 자본주의는 성경을 따르지 않으며, 종교개혁자들도 그러한 태도를 간섭하지 않았다. 성경의 가르침은 절대공정과 사랑입니다. 어떠한 사회체계에 있어서도, 인간의 죄는 약한자를 희생으로 하여 이익을 얻으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가난한 자들을 박탈하려는 자를 하나님 나라에 들여보내시지 않습니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비난받고 있는 죄는 뇌물입니다. 현대에서도 가장 성행되고 있는 죄입니다. 전쟁중에도 국경을 넘기위해 관리자들로부터 뇌물을 요구받고 있다는 보도가 있을 정도입니다.

 

맺음) 이런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참된 예배자로써 여호와의 윤리기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성산에 들어가 안전하게 살며, 그 어떤 것이라도 영원한 은혜로부터 그를 쓰러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그저 은혜로만이 살아가는 모든것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 안에 일해주시는 성령님의 성화를 위한 일하심이 매일매일의 생활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나아가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역사상, 이곳에서 말하는 대로 살아온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단 한분 뿐입니다. 우리들은 크든 적든 이곳에 나오고 있는 모든 죄를 경험해오고 있습니다. 주 예수의 대속의 죽음 이외에 구속받을 방법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변화되는 매일매일을 걸어가는 것뿐입니다.

요한일서2: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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