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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年5月31日 礼拝 説教(日本語文、韓国語文)

2015年5月31日 礼拝音声

 

2015年5月31日 Ⅰテモテ1:12-17 招詞ルカ23:34 「御霊の実は寛容」

 序文)御霊の実は「・・寛容・親切・善意・・」これは他人に対する私たちの関係を示します。寛容は他人の不作法や不親切を堪え忍び、仕返しをしないこと、赦すこと、親切は他人を傷つけようとする思いを少しも持たないということを越えて、すべての人に対して善を願うという積極的なものです。善意は、その心の願いを行動に移すこと。具体的に建設的方法によって人々に仕える主導権をとることです。寛容 ⇨ 親切 ⇨ 善意とことがらは上昇します。

 

Ⅰ 文字の勉強から始めましょう。

 寛は宀と莧からなっている字です。宀(ベン)は家です。莧がカン・クワンと音をしめします。意味は偶像に仕える巫女(ミコ)のことです。家の中に巫女がいる。先祖を祭る廟(ミタマヤ)の中で、眉を太く大きく描いた巫女が祈りをしている形。うっとりとしてくつろいで神託をうけている様子。そこから「ゆるやか」さらに「ゆたか、ひろい」の意味となる。すべての人の気質、態度について言うようになった。容は宀と谷です。谷はヨクという音です。ヨウという音はヨクが変化したのです。意味は「なかがあいている」こと。容は家が大きく受け入れるゆとりがあることを意味します。寛容は「こころが広く人の過ちをとがめだてしないこと。」

「他人のことばを広いこころで聞き入れること」をさします。聖書の寛容は、「御霊の実」ですから、神様の寛容をさします。信仰を与えられた者は、神様の寛容なこころをいただき実を結びます。それは世の中の寛容と規模も性質も同じではないのです。なお日本語聖書では、忍耐とも翻訳している箇所があります。

 

Ⅱ パウロにたいして示された神の寛容 Ⅰテモテ1:12-17

 16節「しかし、そのような私があわれみを受けたのは、イエス・キリストが、今後彼を信じて永遠のいのちを得ようとしている人々の見本にしようと、まず私に対してこの上ない寛容を示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改心以前のパウロは、神を汚す者、迫害する者、暴力をふるう者でした。 パウロは主イエス・キリストの弟子たちに脅迫と迫害の息を弾ませていた。彼は教会を破壊しようとしていた。これほど大きな罪はないほどに、神の前には断罪されることがらでした。しかし、主イエス様はパウロに憐れみを示し、大いなる恵みを与えられた。彼が知っていてこの罪を犯したのなら赦されることはないほどである。神を汚し聖霊をけがしたのだから。しかし彼は不信仰で、無知であった。だから主はあわれみくださった。私たちのほとんどが生まれつきのままでパウロと同じように、いやそれ以上に無知と不信仰で、聖書の神様は全然知らないで育った。そこで示されたまことの神様の長い忍耐・寛容は計り知れない。その上で与えられた恵みは大きく豊かで計ることができない。主はパウロに対して「寛容・忍耐」を示してくださった。どれほどの罪人でも、神の恵みを受けられないと言う絶望はないということの例としてパウロがいる。神の寛容の程度は、これ以上にさらに深い。

 神様は私たちに対しても同じように豊かな慈愛、寛容と忍耐を込めて、悔い改めるのを待っておられる。ローマ2:1-4。神の慈愛・寛容・忍耐深さ、辛抱強さ、すなわち神が裁きの御手を控えておられるという事実が、罪をもっと続けて良いという口実になるのでは決してない。むしろ悔い改めの媒介と矯正の機会として用いられるべきである。寛容は、私たちの救いのためです。

 

Ⅲ 主イエスの寛容・忍耐の発露はどこにあるのか? ルカ23:34

 私たちの罪のための身代わりとして、十字架にかかって死んでくださった主イエス・キリスト様の最後の祈りのことばに明白に示されている。「父よ。彼らをお赦しください。彼らは何をしているのか自分でわからないのです。」主の寛容が具体的にゆるしという発露として示されています。どれほど大きいことでしょうか。

 私たちは、赦せない人間です。だれもがそうではないでしょうか?復讐は古くからの文学・芸術のテーマの一つで、人々が愛好しています。私たちの赦せないと言う思いを代弁して、心の中の相手に復讐してくれるので、主人公は歓迎されます。クリスチャンにも赦せないという思いがあることは、次のような聖句で証明できます。コロサイ3:13「互いに忍び合い、だれかが他の人に不満を抱くことがあっても、互いに赦し合いなさい。主があなた方を赦してくださっ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そうしなさい。」不満を抱くとは赦せないということです。赦せると不満はなくなるのです。誰かのことばや、態度や、やり方が赦せないのです。不満でこころがふくれあがり、やり場のないいらだちをもって生きている人が、なんと多いことでしょうか。

 主イエス様の赦しが、どれほど偉大かがわかります。ご自分に敵対する者をも、迫害者をも、赦されるのです。神様の赦しは、主イエス様の命を犠牲にした赦しです。人間同士なら赦す、赦せないはお互いの問題で済みますが、神様が人間を赦すことは、当然ではありません。絶対者であり、最も聖く、最も義であるおかたですから、当然といえば裁くことです。それも神を汚す者を直ちにです。それを神様は救いのために信仰に入るまで長く忍耐し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寛容の深さをしります。

 クリスチャンは、この祈りを受けて、主イエス様から赦されたものとして歩みを開始しました。罪を自覚した者が、自分で解決できないことを知って十字架の身代わりを信じ、キリスト様を仰いだ結果、信仰によって恵みを与えられたのです。

 

結び)クリスチャンの寛容はどのように示すのでしょうか。信仰を与えられた者たちが、内に住まわれる聖霊様によって、寛容な具体的あり方を示すことが求められているのです。のろいと恨みのことばを延々と吐き続けることをやめ、こころの奥底から主に赦された幸いと、人を赦す幸いを経験しましょう。一番難しいことをいのちがけでしてくださった救い主を見上げて、わたしたちも、互いに赦し合い寛容になりましょう。

 

2015 5 31   디모데전서 1:12-17 

초대의  누가복음23:34 성령의 열매는 관용

 

 서문) 성령의 열매는 「∙∙, 오래참음, 자비, 양선, ∙∙∙」 이것은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오래참음은 타인의 무례함이나 불친절을 참으며,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 자비는 타인에게 상처입히려는 마음을 조금도 갖지 않는 것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을 바라는 적극적인 마음입니다. 양선는 그 마음의 소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구체적으로 건설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섬기는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참음⇒ 자비⇒ 양선의 순으로 상승됩니다.

 

Ⅰ 글자의 내용부터 공부해봅시다.

 寛은 宀과 莧로 되어있는 글자입니다. 宀은 집입니다. 莧이 관이라는 음이 됩니다. 이것의 의미는 우상을 섬기는 여성을 나타냅니다. 집 안에 무녀가 있습니다. 선조를 받드는 영묘안에, 눈썹을 길고 두껍게 그린 무녀가 기도하고 있는 형태. 멍한 상태로 편하게 쉬면서 신화를 받고 있는 모습. 이것으로 「느슨함」, 또는 「풍족함, 너그럽다」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기질, 태도에 관하여 말하게 되었습니다. 容은 宀와 谷로 만들어졌습니다. 谷의 음은 욕입니다. 요우라는 음은 욕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안이 비어있다」입니다. 容은 「크게 집이 받아들이다, 여유가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오래참음은 「마음이 넓어서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거나 하지 않는 것」 「타인의 말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오래참음은 「성령의 열매」이므로, 하나님의 오래참음을 가리킵니다. 믿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마음을 받아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은 규모나 성질면에서 세상의 오래 참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더욱이 일본어 성경에서는 인내라고 번역하는 곳이 있습니다.

 

Ⅱ 사도바울에 대하여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오래참음 디모데전서1:12-17

 16절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개심전의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더럽히는 자, 박해하는 자, 폭력을 휘두르는 자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협박하고 박해하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파괴하려 했습니다. 이것만큼 큰 죄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 단죄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사도바울에게 자비를 나타내시고, 커다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가 알고있으면서 이 죄를 범했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더럽히고, 성령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불신앙이며 무지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사도바울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아니면 사도바울보다 더욱더 무지하고 불신앙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전혀 모른채 자랐습니다. 이곳에 쓰여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거대함과 풍요로움은 측정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 대하여 「오래참음,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예로써 사도바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참음의 크기는 그것 이상으로 더욱 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넘칠만한 인자하심, 오래참음, 인내를 가지고, 회개할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로마서2;14 하나님의 인자하심, 오래참음, 깊은 인내, 깊은 참을성, 즉, 하나님께서 심판의 손을 늦추고 계신다는 사실이 죄를 더 계속범해도 된다는 핑계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회개의 매개와 수정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오래참음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Ⅲ  예수님의 오래참음, 인내의 발로는 어디에서 오는가? 누가복음23:34

 우리들의 죄로인해 대속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기도를 보면 명백히 쓰여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이 구체적으로 용서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곳입니다. 얼마나 커다란 일입니까?

 우리들 인간은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오랜 옛날부터 복수는 문화, 예술의 테마중 하나로, 인간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대변하여, 마음속의 상대를 복수해주는 것으로, 주인공에게 환영받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에게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고」 불만을 갖는다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면 불만은 없어집니다. 누군가의 말이나 태도나 방식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만으로 마음속이 가득 차, 부풀어 올라 그 마음을 풀지 못한채 살아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주 예수님의 용서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을 적대하는 자, 박해자들도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주 예수님의 생명을 희생으로 한 용서입니다. 인간 사이의 용서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서로간의 문제로 지나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절대자이시며, 가장 성스럽고 가장 의로우신 분이므로, 당연히 치뤄져야 할 것은 심판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더럽힌자들을 바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믿음으로 들어갈 때까지 길고 긴 인내로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크리스챤은 이 기도를 받아들이고, 주 예수님께 용서받은 자로써의 삶을 시작합니다. 죄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결과, 믿음으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맺음) 크리스챤의 오래참음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믿음을 받은 자들이 그들안에 살고계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오래참는 것의 구체적인 표현이 요구되어지고 있습니다. 저주와 원한의 말을 언제까지나 내뱉는 것을 그만두고, 마음속으로부터 예수님께 용서받은 축복과 사람을 용서하는 기쁨을 경험합시다. 가장 어려운 일을 목숨을 바쳐 행하신 구세주를 바라보고, 우리들도 서로가 용서하며 오래참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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