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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年4月19日 礼拝 説教(日本語文、韓国語文)

2015年4月19日 礼拝音声

 

2015年4月19日 詩篇 23篇1-6 「ただ感謝だけ」

詩篇23は、助けをえるための願いや、嘆きの訴え、祈りも含まれていません。ただ感謝があるのみです。賛美があふれているのです。この詩篇はただ詠まれて鑑賞するだけで十分な詩篇といわれています。暗唱して、ときにふれて歌うべき詩篇です。本当は説明するようなことをしなくても良い詩篇なのです。

Ⅰ 1-3節 感謝だけ

1 主は私の羊飼い。私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

誰がこれを語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ある人は教会がキリストに向かって語っていると考えます。ダビデがもともとの語り手です。あるイギリスの注解者は、御父に向かって語っておられるキリストの御声であるといいます。この詩篇は、教会により、また、牧者キリストにより、歌われるべき賛美の歌として、聖霊がダビデを霊感して歌わせられたと考えられます。

この詩篇が幼き子供にも、年とった人々にも、強健なひとにも、病気で死の淵を歩いている人にも、また、結婚に際しても、主の晩餐の礼典に当たっても、葬式においても用いられてきました。涙ながらに、喜びいっぱいに、私たちの牧者に対して心からの賛美を捧げるにふさわしいのです。

主イエス様こそ私の牧者です。私に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

主イエス様は、天においても地においても、一切の権威を与えられたお方です。神のひとり子として、王の王として、主の主として、創造主として、一切の所有権をお持ちです。そのお方が、羊飼いとして羊たちのためにまことの愛と憐れみを注いで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乏しいことがあり得ましょうか。ありません。

2 主は私を緑の牧場に伏させ、いこいの水のほとりに伴われます。

緑の牧場に・・羊たちのための柔らかい,若い、やさしい青草のある牧草地・・・は、人が流離いの果てに最後に居所をすることを意味する語からきたことば。

伏させ・・うずくまらせる、横たわる、営をはる、

いこいの水のほとり・・・「静かな水」をあらわすへブル語の慣用句、休息の意味がこもっている。羊たちは静かな、かき乱されない水の流れからでなければ飲まない。

伴われます・・・牧者用の限定的な用語を用いている。牧者が飲み水の有るところへと群れをやさしく導き連れてゆくことを意味する語

3 主は私のたましいを生き返らせ、御名のために、私を義の道に導かれます。

疲れと渇きは、牧者が連れて行ってくれる、静かな清らかな水のほとりで、静かに飲むときにいやされます。これは魂を回復し生き返らせます。あれやこれやで一時うしなっていた落ち着きと平安に、連れ戻し,回復する。義の道に導かれる。

道・・、字義通りには「車の軌道」をさします。「正しき道」によって「平坦な平易な道」を意味する。「義」は基礎的な意味として、「まっすぐ、平ら」を指します。「まっすぐで、正しい目標にみちびく軌道」導く・・・義の道の方向に「私を向かせる」を意味します。

御名のゆえに・・・主はすでにご自身をモーセに啓示しておられました。

 

Ⅱ  詩篇 23篇4-6

4 節 たとい、死の陰の谷を歩くことがあっても、私はわざわいを恐ません。あなたが私と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あなたのむちとあなたの杖、それが私の慰めです。

このことばほど、多くのクリスチャンたちを慰めたことばは他にないのではないかと思うほどです。なぜなら、いったい誰が、人生において死の陰の谷を歩か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かならず直面するのですし、一回だけでなく幾度となく直面することも起こりますから。へブル語は、「・・の陰」と「死」という語の複合詞と理解されてきました。多くの翻訳はほとんどそのように理解しています。でも最近は、「深い陰気な暗闇」という単一の原意と考える傾向に有ります。ヨブ28:1-3「まことに、銀には鉱山があり、金には精練する所がある。鉄は土から取られ、銅は石を溶かして取る。 人はやみを目当てとし、その隅々にまで行って、暗やみと暗黒の石を捜し出す。」にある、暗闇と暗黒の鉱坑のようであると考えます。

「たとえあるゆる種類の驚愕と災害とがおびやかす、墓のように暗く陰気な狭苦しい隘路を歩むときでも、彼は不運を一向恐れない・・旧約文学中ここで初めて出るへブル語名詞は、元々複合詞ではなく・・・ツエレムという動詞から作られている・・・これは最も恐ろしい暗黒の名称である、「死の陰」を意味する。」(旧約学者 デリッチの説)

「あなたがわたしと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は、原語の順番は「なぜなら・あなたは・わたしとともに」です。これは「わたしの側に」、または「近くに立つ」です。良き羊飼いである主イエスさまが、そば近く立っていてくださるので、たとい暗い死のような陰気な谷を歩むときにも、「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という証言なのです。肉体の死、あるいは外科的な大手術とか、何か危険な旅路に家庭や愛しい者から離れるとかのような深刻な体験の最も恐ろしい面は、信者の孤独感です。23篇は、そういう型の暗黒の谷体験を通過する際、何千人とも数え切れぬ人々を慰めてきたのでした。今も慰めています。

「あなたのむちとあなたの杖、」普通の注解者達によると、むちと杖は、羊飼いの曲がり杖を二つ別々の意味に用いたダビデの比喩的用法だと理解されています。すなわち第一は、羊たちをよび集めたり、言うことを聞かないものを懲らしめたりする道案内の杖である。第二は、牧者自身がよりかかる杖です。パレスチナにおける近代的な羊牧業の研究をした他の人々は、あらゆる牧者が二本の杖を携えているといいます。すなわち、私たちが絵でみる伝統的な羊飼い用の長い曲がった柄の杖と、野獣を打ち撃退するための、重い木製の頭の太い棍棒です。

日本語訳は「むちと杖」としています。辞書による「鞭」とはうしや家畜をこらしめるためにもちいる杖またはむちです。ここの「むち」の意味は、従順な羊のやさしい指導と、道草を食う者への懲らしめとの両方における、牧者の羊に対する注意をさす。

「杖」は「よりかかる」「自分を支える」の動詞と関係のある名詞が用いられています。これは羊に慰めをもたらす何か良い物を指します。神からの力の現れと理解しています。

「それが私の慰めです。」慰め・・深い同情の嘆息、物のわかった愛情という思想を含む。キリストを良い牧者ととれば、私たちは彼の同情の数多くの例を思い起こします。ラザロの墓で涙を流され泣かれた時の主。へブル4:15「私たちの大祭司は、私たちの弱さに同情できない方ではありません。罪は犯されませんでしたが、すべての点で、私たちと同じように、試みに会われたのです。」

 

5節 私の敵の前で、あなたは私のために食事をととのえ、私の頭に油をそそいでくださいます。私の杯は、あふれています。

回りを取り巻く敵たちのまっただ中で荒野にひろげられ食卓の図は、たくさんのキリスト教殉教者たちにとって、彼らの死の瞬間に強力な助けになりました。アウグスチヌスは23篇を殉教者用の絶好の詩篇といいました。多くの殉教者達がその瞬間にこの詩篇を詠っていた。

文語訳の「筵」は、へブル語で、食物をおくために地上に平らに横たえられた革の布または獣皮です。ここの動詞「ととのえる」は、神殿で祭司がまきやその他の物を犠牲用に整えるのを指し、また戦闘のために軍隊整備を語るのにも用いられています。ここでは、客人や家族のために食卓をおき食事を備えることに対する普通の表現です。牧者は今や主人となり、良き牧者は、いまその群れを養っているのです。

それは怒り狂った敵達に対峙しているのです。なんという宴会場でしょうか。そうです、クリスチャンの生活は常に敵対する者達の中で、霊的な宴会(礼拝・聖餐式)を行っているのです。たとえ危険のうちにあるとも、キリストは私たちの前に良い食事を用意してださっているのです。

「私の頭に油をそそいでくださいます。」これがダビデのことならすでに預言者によって油そそがれています。キリストのことなら、彼もまた油注がれた王です。もしこれが教会のことをさしているのなら、わたしたちもまた、ヨハネ第一2:27「あなたがたのばあいは、キリストから受けた注ぎの油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とどまっています。それで、だれからも教えを受ける必要がありません。彼の油がすべてのことについてあなたがたを教えるように、——その教えは真理であって偽りではありません。——また、その油があなたがたに教えたとおりに、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のうちにとどまるのです。」これらは良き羊飼いの愛のそそぎを指しています。「私の杯は、あふれています。」杯は旧約聖書ではいろいろの比喩に使われています。ここでは、飲食において、私たちの主から交わりと喜びとを受け取るところのもの、です。溢れこぼれるほどの杯。

 

6節 まことに、私のいのちの日の限り、いつくしみと恵みとが、私を追って来るでしょう。私は、いつまでも、主の家に住まいましょう。

「まことに」かならずの意味。確実さを示す。疑いの余地がない。「いつくしみと恵み」文語訳「恩恵と憐憫」へブル語は「トーブ善と、ヘセズ慈愛」前者は神から付与された祝福、後者は憐憫、慈愛。

旧約聖書中、最大の語の一つ。神の人間に対するあしらいを示す。また人がお互いに処すべき道を示すために用いられる語。ルカ10:37の良きサマリヤ人の示した憐れみ慈愛をさす。牧者の愛は、「わたしを追ってくる」神の恩恵と慈愛が私たちの生涯ずっと共にとどまる。

「いのちの日のかぎり」自分のいのちの日を考えてみてください。良い日もあれば、悪い日もあります。病気、失望、失敗、罪で幾日も台無しにしてしまった日。牧者は配慮を込めて彼の恩恵と慈愛をすべての日に身近にあり続けることを、確信させてくださる。私たちが主を追いかけたのでなく、主が私たち失われた者を追いかけて探し出して救ってくださった。

「私は、いつまでも、主の家に住まいましょう。」ダビデは主の家ということで、礼拝場所をさしていたと考えられます。しかし、それは主との交わりの場でした。わたしたちにとっては、主の家はまさに天にそなえられた家です。主イエス様の約束を信じます。

 

結び)ヨハネ 10:11

主イエス様は、「わたしは良い牧者です。良い牧者は羊のためにいのちを捨てます。」といわれました。ゼカリヤと詩篇の預言通りのめぐみと憐れみと養いを豊かに、今日も、私たちに注いでくださっています。十字架上の身代わりの死、三日目のよみがえり、40日後の昇天、再びおいで下さる事において、良い牧者であり続けておられます。この主の羊である事に感動と深い感謝をもって従い、あゆみつづけましょう。

 

2015 412   예배설교  

초대의  갈라디아서 5:22-23 요한복음15:9-13  성령의 열매는 사랑

서문)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1 「사랑이라는 말을 둘러싸고

놀랄만한 일이지만, 구약성경39권중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글자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 창세기3:15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원복음)의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후 말라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당연한 것으로, 전문서의 배경으로써 취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도  「마태」 「마가」 「누가」 각 복음서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압도적으로 쓰여져 등장하는 곳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3장16절) 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원어는 아가페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명사, 동사, 형용사를 넣어 신약성경 전관에 걸쳐 320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열쇠가 되는 말입니다.

한자로는 「愛」를 사용합니다. 한자의 사랑愛은 부모의 애정도, 남녀의 연애감정도 같은단어로 사용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불충분합니다. 그럼에도, 글자에는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래 사랑은 夂와 旡와 心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夂는 「걸으면서 고민하다」입니다. 旡는 「막히다」 「목이 메다」 라는 의미로, 마음이 메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마음이 막혀 걸으면서도 고민하다」 사라지려고 뒤로 마음이 끌리는 사람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곳에서 「가엽게 여기다」 「아쉬워 하다」의 의미를 표현해왔습니다. 더욱이 흥미깊은 것은, 일본어로써 과거에는 「사랑」을 「かなし」「めぐし」라 읽었습니다. 「かなし」는 불쌍히 여기다는 것입니다. 현재는 나쁜 의미로 사용되지만, 본래는 불쌍해서 그냥 볼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즉, 상대가 가엾어서 두고볼 수 없다. 이것을 생각하면 마음에 메어서 걸으면서도 고민하고 슬퍼한다는 것이 한자의 「사랑 愛」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이 의미로부터, 하늘의 하나님이 그분을 닮은 인격적인 존재로써 훌륭하게 창조해 주신 우리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고,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의 죄안에서 영원히 멸망해가는 것을 보고 깊이 불쌍히 여기시며, 슬퍼하시고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 의미를 초월합니다. 사랑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대속물로 죽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부여하신 사랑은 풍부한 사랑이라든지, 어느 누구라도 평등하다든 등의 사랑의 양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쓰신 사랑(아가페)라는 말은, 일방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사랑을 나타내는 다른 단어는, 에로스(육체적 사랑)은 자신에게만 끌어당기는 사랑, 빼앗는 사랑, 자기만족의 사랑입니다. 필로스(부모, 형제, 자매간의, 우정의 사랑도 포함된다)라는 단어는 상호통행의 사랑, 보답을 구하는 사랑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모범으로 보이시면서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하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보여진 사랑의 크기로, 사랑해주시는 분의 생명을 받아, 다음으로는 자신이 타인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도록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명받아, 사랑이 실행되도록 발견해나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주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자로 변하게 해 주셨으므로 명령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한복음15:9)

주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상대를 사랑하도록. 서로가 일방적인 사랑으로 드러내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서로간에 사랑하므로, 상호통행이라 이해하는 것을 잘못된 것입니다. 보답을 구하지 않고, 각각이 일방적인 참된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3 성령이 맺게해 주시는 사랑

이런 사랑은 제자들처럼 우리들도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과 같이 우리들도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서로가 사랑하는」것이 가능한 생명과 은혜와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의 살아계시는 참된 하나님은 주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로써 태어나게 해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성스러운 영이 믿는 자들에게도 함께 해주시는 것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은 믿는자들에게 그 열매를 맺게해 주심으로 함께 하시는 것을 증거하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5:22) 맺게되는 열매중 가장 처음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수많은 열매중에서 가장 최고의 위치를 성경에서 부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13:13)

맺음) 이 사랑은 사랑하는 것으로 열매맺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당신을 둘러싼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에 사랑이 일하면 깊은 만족과 기쁨과 평안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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