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年6月14日 礼拝 ルカ10:30-37 「御霊の実は親切」
序)親切は他人を傷つけようとする思いを少しも持たないということを越えて、すべての人に対して善を願うという積極的なものです。対人関係においてその人の性質が親切であるというのです。
日本語の「親切」を勉強しましょう。親は辛と木と見を合わせた字です。辛と木は切りたての生の木をいい、そこから「じか」、「ま近」の意味を生じました。見るは目と人を組み合わせた字で、目の働きでみることを指します。親は近くに見る。ま近にみる、したしい人、とくにもっとも情のふかいものが親です。切は刀が形を示し、七(シツ)が音を示します。こまごまとしたものの意味。それで切は刀で細かく切ることを示します。親切は、こまごまとした事までも、間近に見て情け深く思うこと、でしょうか。古い訳は「慈愛」としています。「慈」は子どもを養い育てる心で、いつくしむ意味です。
Ⅰ ルカ10:30-37 サマリヤ人の親切な心
1 (この段落の文脈)
主イエス様が律法の専門家に「何をしたら、永遠のいのちを自分のものとして受け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とためされました。主イエスさまが逆に律法には何と書いてありますか、と応じ、彼らの返事を聞きました。神である主を愛すること、隣人を愛することです、と応えました。主は彼らの知識の正しさは認められたが、実行が全然伴わない知識であることに気ずかせようとされました。律法の専門家は「隣人とは?」と問うことで逃げを打ちました。
御霊の実は「寛容、親切、善意」とつづく部分は、まさに私たちと隣人の関係に結ぶ実です。私たちの隣人とはだれ?律法の専門家たちの偏見は、ユダヤ人だけが隣人という考えでした。異邦人、取税人、罪人は違うというのでした。そのユダヤ人にたいしても、彼らは愛することが出来ていなかったので、主イエスは異邦人扱いされていたサマリヤ人のたとえを話されて、彼らの間違いを示し、行動をうながしました。
2 (本文説明)さて、たとえ話しですが、強盗に襲われて半殺しの目にあった旅人にたいして登場人物の祭司とレビ人とサマリヤ人は、倒れている人を見ました。しかし祭司は反対側を通り過ぎて見て見ぬふりをしました。レビ人も同じ行動でした。かかわり合いを持ちたくないのでした。隣人となりたくなかったのです。めんどうに巻き込まれたくなかったのです。
普段ユダヤ人たちがサマリヤ人のことを罪深い人々と偏見の目で見ていてひとでなしぐらいに思って挨拶もつきあいもしなかった、そのサマリヤ人は彼に近寄って、傷口にオリーブ油とブドウ酒を注いで、ほうたい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き、介抱をしました。今でゆう救急処置を施したのです。その上で、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帰り道に私が払います、と言ったのです。彼はどこが、違っていたのでしょうか。主イエス様の指摘は、サマリヤ人が「彼を見てかわいそうに思った」ことにあるのでした。
「かわいそうに思い」とは心の中の事柄です。この思いが「御霊の実は親切」といわれていることがらなのです。それが、行動に現れ(善意)、言葉に現れて、犠牲をともなう隣人への愛として発揮されたのでした。
Ⅱ 詩篇41:1「幸いなことよ。弱っている者に心を配る人は。」
1 親切な心は、自分のことばかりでなく、他の人のためにも心を配るのです。心を配ることは、心が分かれることです。心が分裂するのです。
聖書では自分自身のために心配することは戒められています。マタイ6:25「だから、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いのちのことで、何を食べようか、何を飲もうかと心配したり、また、からだのことで、何を着ようかと心配したりしてはいけません。いのちは食べ物よりたいせつなもの、からだは着物よりたいせつ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か。」34「だから、あすのための心配は無用です。あすのことはあすが心配します。労苦はその日その日に、十分あります。」このように戒められている理由は、創造者であり、救い主であり、信仰の完成者である天のまことのいきておられる神様が、わたしたちのために心配して下さっているからです。
Ⅰペテロ5:7「あなたがたの思い煩いを、いっさい神にゆだねなさい。神があなたがたのことを心配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
2 でも、他の人のために心配することは勧められています。特に弱っている者のためには、幸いであるとまで言われています。あのサマリヤ人はこれができたのです。
パウロは人一倍クリスチャンと教会のために心配した人です。Ⅱコリント11:3「蛇が悪巧みによってエバを欺いたように、万一にもあなたがたの思いが汚されて、キリストに対する真実と貞潔を失うことがあってはと、私は心配しています。」パウロから弟子訓練を受けているテモテも同じです。ピリピ2:20「テモテのように私と同じ心になって、真実にあなたがたのことを心配している者は、ほかにだれもいないからです。」
エペソ4:32「お互いに親切にし、心の優しい人となり、神がキリストにおいてあなたがたを赦してくださったように、互いに赦し合いなさい。」
コロサイ4:6「あなたがたのことばが、いつも親切で、塩味のきいたものであるようにしなさい。そうすれば、ひとりひとりに対する答え方がわかります。」
仲間同士だけでなく、隣人のために心配する。その魂のために、弱っている者のために、助けを必要としていることのために心配する、その心が行動にまで発揮される。それは幸いであると神様が言っておられるのです。
3 現代の社会全体がこのような親切を欠いている時代です。弱っている者たちが、追いやられ、切り捨てられていく風潮が強いのです。家庭で学校で職場で弱い者、遅い者、暗い者、にぶい者が悪のように言われて、いじめられます。傷つき倒れている隣人に親切な心を、まず持つことから、解決への行動が生まれます。教会もまた「親切」の心が乏しければ、ただ強い人だけの集まりとなってしまいます。御霊の実が豊かに結ばれて行くことで、親切心にあふれた関心と、迎え方と、近寄って助ける歩みを大切にして行こうと祈りましょう。
結び)親切は御霊の実です。神様が私たちに御子を通して、み心の親切を具体的行動に表し、地上に遣わして、罪の身代わりの死を十字架上で遂げさせられました。感謝です。しかし、すべての人間が、その親切と行動を感謝しているとは限りません。むしろ、十字架の上に主イエス様を二度も、三度もつけるばかりの悪い反応をしめすこともあります。そこに御霊の忍耐があります。私たちもまた、親切な心から発して良き行動をしめしても、常に感謝されるとは限りません。むしろ反対の反応を経験するかもしれません。そのような時に、御霊の実としての親切な心配りを取りやめにしないように、主イエス様の模範にならえるように祈りましょう。互いの親切は表現することが難しいけれども、神様が幸いであるといっ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励みましょう。幸いとは幸福であるという意味です。
2015년 6월 14일 예배 누가복음10:30-37 「성령의 열매는 자비(친절)」
서문) 자비는 타인을 상처입히려는 생각을 조금도 갖지않는 것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을 바라는 적극적인 마음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그 사람의 자비로운 성질을 말합니다.
일본어 「자비(친절)」를 공부합시다. 親은 辛와 木를 합한 글자입니다. 辛와 木는 갓 자른 살아있는 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에서 「직접」,「가까이」의 의미가 파생되고 있습니다. 見는 눈과 사람을 합해 만들어진 글자로, 눈의 움직임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親이란 가까이서 보다. 곁에서 보다, 사이가 가까운 사람, 무엇보다 정이 깊은 것이 親 입니다. 切은 刀가 형태를 나타내며, 七(칠)이 음을 나타냅니다. 자질구레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으로 切은 칼로 작게 자르는 것을 말합니다. 자비(친절)란 작은 소소한 일까지도 바로 곁에서 보고 깊은 정으로 생각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고어역으로는 「현애」라고도 합니다. 「현」은 아이들을 키우는 마음으로써 자비로운 이라는 의미입니다.
Ⅰ 누가복음10:30-37 사마리아인의 자비로운 마음
1 (이 단락의 문맥)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주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있는지 반대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 대답은 주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내 몸과같이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바른 지식은 인정하셨지만, 실천하지 않는 지식임을 깨닫게 하려 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으로 도망치려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래참음, 자비, 양선」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우리들의 이웃은 누구인가? 율법학자들의 유대인만이 자신들의 이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 세리, 죄인은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조차도 사랑하지 못했으므로 주 예수님은 당시 이방인 취급은 받고 있던 사마리아인의 예화를 들어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시고, 행동을 깨닫게하셨습니다.
2 (본문설명) 예화에 대하여 말하자면, 강도를 만나 반죽음이 된 여행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등장인물의 제사장과 레위인, 사마리아인이 보게되었습니다. 이 때 제사장은 이 여행자를 못본척 했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관계를 맺고싶지 않았습니다. 이웃이 되고싶지 않았습니다. 귀찮은 일여 말려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에 대해 죄인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같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인사도 관계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이 여행자 곁에 다가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바르고, 싸매어주고, 자신의 가축에 태워 여관에 데려가 간호를 했습니다. 지금으로 하자면, 응급처치를 한 것었습니다. 더욱이 비용이 더 들게될 경우에는 돌아오는 길에 그가 치루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디가 달랐을까요? 주 예수님의 지적은, 사마리아인이 「불쌍히 여겨」라고 말한 것에 있었습니다.
「불쌍히 여겨」란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생각이 「성령의 열매는 자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동으로 나타나(선의), 말로 표현되고, 이웃에게 치루는 희생이 사랑으로 발휘된 것입니다.
Ⅱ 시편41: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1 자비의 마음은 자신의 일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마음을 베푸는 것입니다. 마음을 베푸는 것이란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분열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자기자신을 위해 걱정하는 것은 경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런 경계의 말씀이 있는 것은 창조주되시며, 구세주 되신 믿음의 완성자되신 참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걱정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하지만 타인을 위해 걱정하는것은 권하고 있습니다. 특히 약한자를 위해 걱정하는 것은 복이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그것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크리스챤교회를 위해 누구보다도 걱정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11:3 뱀이 그 간계와 하와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바울에게 제자훈련을 받고 있는 디모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립보서2;20「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에베소서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4:6「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친한 사람만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걱정하는 것. 그 영혼을 위해, 약한자를 위해,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을 위해 걱정하는것, 그 마음이 행동으로 발휘되는 것. 그것이 복있는 것임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3 현대사회 전체가 이런 자비에 결핍되어 있습니다. 약한자들이 쫓기며, 버림받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약한자, 늦은자, 어두운 자, 둔한 자들이 악한것처럼 여겨지고, 따돌림을 받고 있습니다. 상처받아 쓰러져있는 이웃에게 자비의 마음을 가지는 것부터가 이 문제의 해결을 향하게 합니다. 교회도 또한 「자비」의 마음이 결핍되면, 그저 강한사람들의 집단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성령의 열매가 풍요롭게 맺어져가는 것으로, 자비에 넘친 관심과 수용하는 마음과 곁에 다가가 돕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기도합시다.
맺음) 자비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 아들을 통해 그분의 자비를 구체적 행동으로 보이시고, 지상에 보내셔서 죄의 댓가인 죽음을 십자가위에서 해결해주셨습니다.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그 자비와 실천에 감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십자가위에 계신 예수님을 두번, 세번 반복해서 못밖는 죄된 행도을 하기도 합니다. 이곳에 성령의 인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비의 마음으로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언제나 감사를 받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로 반대의 반응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때에는 성령의 열매인 자비의 마음을 기억하고 그만두지 않도록, 모범을 보여주신 주예수님을 배우도록 기도합시다. 서로간이 친절은 표현하는 것이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복있는자라고 말씀해주셨으므로 잊지않도록 합시다. 복있다는 것은 축복이 있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