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年7月5日礼拝 ルカ22:31-34 招詞エペソ5:8-9
「御霊の実は善意」
序)善意(GOODNESS)は親切な心の願いを行動に移すことをさします。漢字の「善」は古い形では「譱」(ぜん)で「羊」と「言言」(キョウ)からできました。羊は祭りで神へのいけにえとして用いたり、食用にするめでたい動物です。言言は原告と被告の発言の意味で両者がよい結論を求めるさまから[良い]を意味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意は音と心を合わせた字。音はことば。意は、ことばを察して、人の心に思っていることを知るということから、心に思っていることを表します。[おもい]です。
では、主イエス様が弟子たちに示された善意について学びましょう。
Ⅰ ルカ22:31
1 信仰者はこの世で信仰の試練にあいます。み国での完成に向かって真実に歩む者を主は訓練して、神のご栄光に結びつけ、役立つものに変えようとされるのです。その時、神様の側では善意を示して、試練にあっている者の心を練り鍛え、主イエス・キリストへの信頼が増し加わるようにと働かれます。み子イエス様はご自分が十字架を目前にしている危機の時に、なお、愛する弟子ペテロのために示された善意が、ここに記されています。私たちは自分が危機的状態の時でも、他の人に向かってなお善意を示しうる存在であることを教えられるのです。このような善意は御霊の実というしかありません。
2 私たちが信仰の試練の時に罪に陥る原因は、おおよそ三通りあります。
① 自分たちの内に残っている、罪の腐敗の優勢さのために罪を犯す。ローマ7:19-25。
② 自分を保持する恵みの手段を怠ること-みことば・祈り・礼典をないがしろにすること。③ 今日のみことばにあるようにサタンがしかけてくる誘惑です。主イエス様の弟子の中で筆頭であったペテロに、サタンは襲いかかろうとしていました。麦のようにふるいにかける。ペテロがかけられたふるいは、主イエスの逮捕と十字架の死と迫害への恐怖です。またこの世の誘惑です。私たちを主イエスから引き離し、永遠の滅びに引き込もうとする、現実的な人格的な存在であるサタンは信仰者達を挫折させることに目的を持って活動しているのです。ただ信仰者をふるうことは本来神様のお働きであって、それによって信仰者の信仰をためし、強く打ちなおしするために起こるのです。銀を精錬するように信仰を精錬されるのです。神が私たちをためされるときは、神から捨てられたように感じます。これはその信仰が不死のものであるかどうかをためす一つの道です。
喜びだけが信仰のすべてではありません。主は時には主が恐るべき方であることを示そうとして信仰をためされます。また時には、アブラハムのように最愛の者を差し出すようにとためされます。そのような中で、信じ従いとおすことが唯一の逃れる道となっていることを見せられるのです。
本来は神の働きであることをサタンは丁度、ヨブにたいして行ったようにペテロにしようとして許可を求めました。神はこの求めを聞かれました。ペテロのことは最終的に神の手の中にあったのです。ペテロは性格的な弱さを徹底的にやきつくされ、自我を砕かれてキリストの内に円熟した人物へと変えられて復活の主の前に残りの生涯を全力を傾けて歩み通しました。その背後に主イエスの善意が溢れていました。
Ⅱ ルカ22:32
1 主イエス様はペテロの信仰がなくならないようにと祈りました。ペテロの信仰は、なくなる危険性がありました。私たちはどうでしょうか。立ち直ったらといわれたのは、つまずく危険性もあったからです。事実ペテロはつまずきました。33節の答えは、ペテロの信仰が自分の力により頼む信仰であった証拠です。他の人のために親切や善意を示したペテロを見ることはほとんどないのです。自分の勢いで生きているのです。自負心や気負い、がんばりから解放されていないのです。信仰がないのではありません。ただ自分のための信仰なのです。気分や感情が信仰を支配しているのです。信仰が気分や感情を支配しなければ、とても他の人を長く力づけることなどできないのです。善意の行動を示す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それでも主イエスはペテロのこのような信仰を「あなたの信仰」といってくださったのです。
2 その上で、つきはなさず、あきらめず、取りなしの祈りというペテロへの善意の行動をなさいました。「あなたのために祈りました。」主イエスさまは今日もわたしたちに「あなたのために祈りました」といって下さっているのです。善意は人間の問題に目をつぶ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目をそらすことでもありません。弱さは何か、欠点は何か、罪は何かをごらんになっています。はっきりと指摘されます。しかし問題だといって終わらせるのでなく、心から祈って下さったのです。これが善意です。ペテロの現実に失望することなく、あなたのために祈りました。といって下さるのです。
3 それは、私たちが「立ち直る」という明るい未来を見て下さっているからです。立ち直り兄弟達を力づけているペテロを見て下さっているのです。青年の危うい信仰の未来に、教会の指導者であるペテロをみておられるのです。つまずくけれども立ち直る姿をみておられる。それで本当の意味で人を力づけるペテロをみておられるのです。ペンテコステ以来のペテロを覚えましょう。迫害を受けて、主と同じように十字架につけられて死ぬことを選んで栄光を神に帰したペテロを見ておられたのです。
Ⅲ ペテロのために神の力に期待された。
1 私たちが主イエス様のこの模範に習って善意を発揮するとき、それは神の力に一番期待するということを覚えましょう。
人に対する期待には限界があります。しかし神に対する期待には限界がないのです。そこに祈りが生まれます。
神は罪深い私たちをご自身に振り向かせ、救われました。罪人を神の聖徒に変えられました。弱気な者を励まし、福音のために勇士にする力があります。怠惰な者を精気溢れる者に変えて、見違えるほどの働きをさせるお方です。地獄の淵に沈むものを、御国の門守に変える力があります。
主イエスの善意は、私たちを変えました。私たちの他の人への善意は、神への期待により、他の人を変えるのです。それぞれの過去に捕らわれることなく、現在の姿がすべてではないと思うことに善意が働くとき、創造主・救い主・完成者イエスのごらんになっている、あなたと他の人にたいするすばらしい神の子たちとしての未来があるのです。
2 Ⅰペテロ5:6-7「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が、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してくださるためです。あなたがたの思い煩いを、いっさい神にゆだねなさい。神があなたがたのことを心配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
「思い煩い」ペテロは、6節の「へりくだりなさい」という文脈をつづけて、どのように実行されるべきかを示すために、7節を分詞句でつないでいます。へりくだりは、思い煩いをいっさい神にゆだねることで、適切な謙遜が達成されるといっています。それは、「思い煩い」が、神がすべてを知り、治めておられる力と真実と考えるならば、その日々の導きのたしかさを認めるなら、神にゆだねる心が起こるはずであるが、そうしないで、自分で何とかしようとすることから、心があれこれと分裂して思い煩いとなる。それは聖書の創造者、摂理者、完成者である神様を認めず高慢にも、何もかも自分でと考えることからくる。しかし、いっさいをこの神様にゆだねるなら、すなわち、へりくだって神を神とするならば、神があなたのことを心配していてくださることに気づき、また事実そのすべてを栄光のために最善になるようにと支配されることがわかる。
わたしたちは、主にある兄弟姉妹のためにより重要な存在としてみとめ配慮することが求められているが、それができない障害は、「ではいったい誰が自分のことを心配してくださるのか」という人間の正当な心配であると知っている。それで、神ご自身が、私たちの必要について心配してくださっていると答えている。神は主イエス様の救いによって、ご自身の「子とした」ひとりひとりのために絶えず心配しおられるからです。このことは、自分の絶えない心配から解放されて、他の兄弟姉妹のために配慮できることを可能にする。
神の親切と善意が、私たちに向けられて発揮されていることを認め受け入れる時に、「ゆだね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ゆだねる」とは、何かをほかのだれか、他の何かの上に投げかけることです。私たちのいっさいの不安を神にゆだねることは、神を神とすること、救い主を救い主とすることです。詩篇55:22「あなたの重荷を主にゆだねよ。主は、あなたのことを心配してくださる。主は決して正しい者がゆるがされるようにはなさらない。」詩篇68:19「ほむべきかな、日々、私たちのために重荷を担われる主、私たちの救いであられる神」 だから、主は「明日のことを思い煩うな。」と言われました。神が、あなたのことを心配してくださる。私たちのために重荷を負ってくださる。この主の善意のおこころを思い知るように。
結び)さらに神は、ひとり子をわたし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このお方が惜しまずに万物を与えてくださらないはずがあろうか。と使徒パウロはローマ8:32でいっている。神はわたしたちを破滅にではなくて、成長と完成に導こうとしておられる。たとえ、どのようなことがあろうとも、神の愛には変わりはない。体験するすべてにおいて、平安をもって神を見上げましょう。
2015년 7월 5일 예배 누가복음22:31-34 초대의 말씀 에베소서5:8-9
「성령의 열매는 양선」
서문) 양선(GODNESS)이란 친절한 마음의 소원을 행동으로 옮기것을 말합니다. 한자의 오래된 형태로는 「譱」(선)으로, 「羊」과 「言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양은 제사 때,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물로 쓰이거나, 식용으로 사용되는 기쁜 일에 쓰이는 동물입니다. 言言은 원고와 피고의 발언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자가 좋은 결론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좋은〕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意란 音와 心을 합한 글자. 音은 글자. 音은 말을 가리키며, 사람의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들을 안다는 것으로부터, 마음에 생각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생각〕입니다.
그러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양선에 대하여 배워봅시다.
Ⅰ 누가복음 22:31
1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시련을 맞게 됩니다. 하늘나라에의 완성을 향해 진실한 삶을 사는 자들을 하나님은 훈련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관련지으시고,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바꾸어 주십니다. 그 때에, 하나님쪽에서는 믿는자들에게 양선을 보이시고, 시련을 만나고 있는 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더하도록 일해주십니다. 아들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목전에 두셨던 위기의 순간에도,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해 나타내신 자비가 이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신이 위험한 상태에 처할 때에도, 타인을 향해 양선을 보이는 존재가 되도록 이곳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선은 성령의 열매로 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2 우리들이 믿음의 시련중에서 범죄하게 되는 원인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가 있습니다.
① 우리들 속에 남아있는 부패한 죄의 우세함으로 범죄하게 된다. 로마서19:25
② 자신을 유지해주는 은혜의 수단을 태만히 하는 것- 말씀, 기도,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것.
③ 오늘 말씀에 나온 것처럼, 사탄으로부터의 유혹입니다. 주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필두에 언급한 베드로에게 사탄은 덮치려 했습니다. 밀 까부르듯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시험은, 주 예수님의 체포와 십자가의 죽음, 박해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유혹이었습니다. 우리들을 주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뜨리려는, 현실적이며 인격적인 존재의 사탄은 믿는 자들을 좌절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을 유혹하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권한속에 있는 것으로, 그것으로 믿는 자들의 신앙을 시험하셔서 더욱더 강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동을 정련하는 것과 같이 믿음을 정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시험하시는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그 믿음이 불사의 것인지 어떤지를 알아보는 한가지 방법입니다.
기쁨만이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두려운 분임을 나타내시려 믿음을 시험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때로는 아브라함과 같이 가장 사랑하는 자를 내어드리도록 시험하십니다. 그러한 중에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유일한 피할길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탄이 욥에게 행한 것처럼, 베드로에게도 하려고 허락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최종적으로 베드로의 모든것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성격상 약한점을 철저하게 태워없애, 자아를 깨뜨려 그리스도 안에 원숙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부활의 주님앞에 남은 생애를 전력을 다해 걷는 삶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배후에는 주 예수님의 양선이 넘쳐있었습니다.
Ⅱ 누가복음22:32
1 주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없어지지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없어지게 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돌이킨 후에, 라고 말씀하신것은 넘어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33절의 대답에서, 베드로의 믿음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한 믿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사람을 위해 자비나 양선을 보인 베드로를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기세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부심이나 각오, 열심에서 해방되어있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을 위한 믿음인 것입니다. 기분이나 감정이 신앙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기분이나 감정을 지배하지 않으면, 타인을 오랫동안 격려할 수 없습니다. 양선의 행동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러한 신앙을 여러분의 신앙이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2 그럼에도 예수님은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베드로를 위해 중보기도하신 양선의 행동을 보여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양선은 인간의 문제에 대해 눈을 감는것이 아닙니다. 눈을 돌리는 것도 아닙니다. 약한 점이 무엇인지, 결점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를 보고 계십니다. 분명히 지적하십니다. 하지만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기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양선입니다. 베드로의 현실에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3 그것은 우리들의 「돌이킨 후에」라는 밝은 미래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는 베드로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위태위태한 믿음에도 장래에 교회의 지도자 된 베드로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그것으로 진실한 의미로써 사람을 굳게하는 베드로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펜테코스테 이후의 베드로를 생각해봅시다. 박해를 당하고,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선택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베드로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Ⅲ 베드로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셨습니다.
1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러한 모범을 배워 양선을 발군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기대하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사람에 대한 기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기대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곳에 기도가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죄깊은 우리들을 그분에게 마음을 돌리게 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죄인을 하나님의 성도로 변하게 해주셨습니다. 연약한 자들을 격려하시고, 복음을 위한 용사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태만한 자를 활기넘치는 자로 변하게 하시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일하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지옥의 한 구석에 가라앉는 자를 하나님의 수위병으로 변하게 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 예수님의 양선은 우리들을 변하게 하십니다. 타인을 향한 우리들의 양선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다른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과거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것으로 양선이 일할 때, 창조주, 구세주, 완성자되신 예수가 보고 계신 타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여러분의 놀라운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2 베드로전서5:6-7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염려」 베드로는 6절의 「겸손하라」라는 문맥에 이어서 어떻게 실행해야할지를 나타내기 위해, 7절을 분사구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겸손이란,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으로, 적절한 겸손이 달성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염려」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통치하고 계시는 능력과 진실을 생각한다면, 그날의 인도하심의 분명함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이 생길것이지만, 그렇지않고,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하려한다면, 마음이 이일저일로 분열되어 염려하게 됩니다. 그것은 성경의 창조자, 섭리자, 완성자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않고, 거만하게, 무엇이든 자신의 힘으로 하려는 생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 하나님께 맡긴다면, 즉, 겸손하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하나님께 여러분의 일을 걱정해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한 사실 자체 모든 것을 영광을 위해 최선이 되도록 지배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안에서의 형제 자매들을 보다 중요한 존재로써 배려해야 할 것임을 말씀하시지만, 그렇게 할 수 없게되는 장애는 「그러면 누가 내일을 걱정해 줄 것인가」라는 사람의 정당한 걱정에 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필요에 대하여 걱정해 주신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 예수님의 구원을 통해, 그분의 「자녀된」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끊임없이 걱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끝없는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어 다른 형제자매들을 위해 배려하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양선이 우리들을 향해 발군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맡기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맡기다」란, 무언가를 다른 누군가가 다른 어떤것 위에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불안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구세주를 구세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편55;22「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68:19「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일 일을 근심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을 걱정해주십니다. 우리들을 위해 짐을 대신 져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양선의 마음을 깨닫도록 합시다.
맺음) 더욱이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한 분이 우리에게 만물을 아낌없이 주시지 않을리가 없습니다. 라고 사도바울은 로마서 8:32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멸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완성으로 인도하시려 합니다. 비록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체험하는 모든일에 있어서, 평안으로 하나님을 바라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