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年12月20日 クリスマス説教 ヨハネ1:14「しもべとなられた御子」
「ことばは人となって,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た。私たちはこの方の栄光を見た。父のみもとから来られた一人子としての栄光である。この方は恵みとまことに満ちておられた」(14節)
序文)クリスマス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神さまが、預言者イザヤを用いて、しもべであるメシヤの到来を預言しておられました。実際に、御子がしもべとなるためには、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ることが必要でした。御子のこの世への到来がどのようであったかを使徒ヨハネは1:1-13節まで示しています。
1 神であった「ことば」は、14節「人となって」(新改訳)・「人間となった」(共同訳)・「肉体となりて」(原語、文語訳)、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ました。翻訳上は「肉体となりて」がよいのです。神の御子が、わたしたちのために,その栄光の高みから、「しもべ」となるために、どれほどにいやしく低劣な状況にまで、下ってこられたかを明示しようとしています。そのために「人間」という原語をつかわないで「肉」という語を使いました。聖書で,人間の事を軽蔑して言うときは「肉」と呼んでいます。神の子が、私たちの肉の腐臭に満ちた汚辱のあいだに,大きなへだたりを越えて下られた。見たり、聞いたり、触れたりできる方、人間の人格をもちいて神の子の人格を表された。
聖なる救い主キリストは罪人を救うために、神のしもべとしてご自身の上に、まさしく「肉」(人性)をおとりになった。私たちの全性質をとられた。肉体と理性的霊魂をとられたのです。
私たちと同様に女性から生まれた。それで知恵と身の丈の両面において嬰児から少年へ、それから大人へと成長された。時間と空間の制約を受けられた。汗を流し、疲れ、餓え、苦しむ可能性をもって肉体上の不利な条件を受け入れられた。祈る事をされた。旧約聖書を読み、試練に会い、誘惑を受けた。父のみ旨に,人・しもべとしての意志をもって従われた。
この肉体で、家族のために大工仕事をして稼ぎ、メシヤとしての公の生涯に立ってからは、「悔い改めなさい。天の御国が近づいたから」(マタイ4:17)と宣教してまわられた。ついには十字架の上で血をながし、肉を裂かれ、実際に死なれた。さらに葬られた。それから三日目に身体をもってよみがえられた。その事実である証明を弟子たちに見せられた。40日後に、天にお上りになられた。この一切の瞬間において、「ことば」は人であると同時に神であられた。
キリストの内に、神としての性質と人としての性質の二つの完全な性質が結合して「ことばが肉体となった」のです。
どのように結合したか、その状態について説明は不可能である。しかし、この事は事実としておこった。それでウェストミンスター信仰告白は8章第二項目で次のように告白しています「三位一体の第二人格である神のみ子は、まことの永遠の神でいまし、み父とひとつの本質でまた同等でありながら、時満ちて自ら人間の性質を、それに属するすべての本質的固有性と共通的弱さもろとも取られ、しかも罪はなかった。彼は聖霊の力により、処女マリヤの胎に彼女の本質をとってみごもられた。そこで、十全なそして異なった二つの性質、すなわち神たる性質と人たる性質が、移質、合成、混合なしに、ひとつの人格の中に分離できないように結合されている。この人格はまことの神またまことの人で、しかもなお、一人のキリスト、神と人との間の唯一の中保者である。」
2 「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た。」「住む」原語では「天幕」を張ること。ことばは私たちのうちに宿営(キャンプ)された。「ことば」の宿りは一時的(約33年間)であったが、幻のようなつかみどころがないことではなかった。この「住む」という動詞は新約聖書では5回だけ使われており、4回はヨハネ黙示録にあるが、特に、来たるべき新天新地の様子を(21:3)「見よ。神の幕屋が人とともにある。神は彼らとともに住み、彼らはその民となる。」と描いている。ギリシャ語訳の旧約聖書では「幕屋」には、神の臨在が「宿った」とあります。
使徒パウロはこの辺の事情を次のように説明しています。キリストが「しもべ」であることを説明しています。「キリストは神と等しくあることを固守すべきこととは思わず、かえって、おのれをむなしくしてしもべのかたちをとり、人間の姿になられた。」(ピリピ2:6)
さらに、おのれを低くして不名誉な十字架の死にまでつかれた。主はその誕生においては客間にはいる余地がないというので家畜小屋に生まれた。飼葉桶に寝かせられた。ナザレの大工の息子として貧しさのうちに生活を送り、メシヤとして公生涯に立たれてからは、人々を教え、いやしてまわられた。その道中でも「狐には穴があり、空の鳥には巣があるが、人の子には枕する所もありません。」(マタイ8:20)といわれた。徹底したしもべとしての生涯であった。
悪霊を追い出してもらったり、病気をなおしてもらった数人の婦人たちは、この貧しきキリストのために、自分たちの持ち物をもって、イエスに奉仕した。また主は宮の納入金を納めるために、ペテロをガリラヤ湖に行かせて魚をとらせ、その口の中から出てきた金貨を用いた。十字架上の死にのぞんで自分の母親マリヤの面倒を見てもらうために、弟子ヨハネに頼み込んだ。十字架上の死後は借り物の墓に葬られた。
さらにキリストは、当時、身分の卑しいといわれていた人々と交わられた。「取税人、罪人の仲間」とまで呼ばれた。罪人であった女が香油をぬったのを喜んでお受け下さり、彼女の罪を赦された。弟子たちも皆、身分の貧しい人々であったが、主は天国の偉大な奥義を彼等に現わされた。主は仕える者・「しもべ」として歩まれ、最後には弟子たちの足まで洗らわれた。
また、主はこの地上で本当の意味で理解してくれる友を持たなかった。その使命の特異さの故とはいえ、孤独という点では、主ほど使命の故に孤独を味わわれたお方は他にいない。十字架上では最愛の父なる神から、見捨てられた。「わが神、わが神、なんぞ我を見捨てたまいし。」と叫ばれた。
なぜこれほどの貧しい状態にて地上生涯を送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か。
それは「主は富んでおられたのに、あなたがたのために貧しくなられ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の貧しさによって、富む者となるためです」(コリント第二8:9) 。
3 この目的は何だったか?
それは「私たちはこの方の栄光を見た。父のみもとから来られた一人子としての栄光である。この方は恵みとまことに満ちておられた。」(ヨハネ1:14)とあるとおり、み子の栄光を啓示することでした。「見た」の原語は「観察した」事を意味する。このことばは「劇場」の語根を含みます。ただ、漫然と見たのではなく、それ以上の意味を持っています。このことばは、自分の目前にあるものの意義を理解するために、そのものを注意深く調べるという意味を含みます。
「私たち」ヨハネを始め、弟子たちは、そのようにイエス・キリストを見たのです。特に「山の上の変貌」のイエスを見たのです。「彼らの目の前で、御姿が変わり、御顔は太陽のように輝き、御衣は光のように白くなった」((マタイ17:2)。神の子としての栄光に輝くイエスを見たのです。弟子たち一同がイエスの公生涯を見た。結論は「父のみもとからこられたひとり子」である「この方は恵みとまことに満ちておられた」です。さらには「いまだかつて神を見た者はいない。父のふところにおられるひとり子の神が、神を解き明かされたのである。」(1:18)と結論した。
信仰の対象者の観察と信仰告白との間には、真理を自分のものとするという事実があります。
「恵みとまことに満ちて」恵みの福音に満ちあふれ、真理に満ち、真実で確実な慰めのことばを持ってこられた。それらは儀式律法の難儀な要求ではなくて、かたちや象徴や影ではない。ほんものの救い主である。彼が私たちにもたらした富はどれほどであったか!
主は、どのようにしてわたしたちを富むものとしてくださったか。
まず、み子の十字架の贖いを受けたわたしたちは、霊的にはかりしることができない祝福を受け富むものとなった。ひとことでいうとキリストが持っておられた栄光を受け継ぐものとなった。主イエスは言われました。「わたしは、あなたがわたしに下さった栄光を、彼らに与えました。それは、私たちが一つであるように、彼らも一つであるためです」(ヨハネ17:22)。
ペテロはこのことをキリストのご性質にあずかるといっている。義、聖、子としての祝福、それらにともなう高挙、栄光の復活。パウロはキリストと共同の相続人とされたと言っています。「もし子であるなら、相続人であります。私たちがキリストと、栄光をともに受けるために、苦難をおともにしているなら、私たちは神の相続人であり、キリストとの共同相続人であります」(ローマ8:17)。「それは、あとに来る世々において、このすぐれて豊かな御恵みを、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私たちに賜る慈愛によって明らかにお示しになるためでした」(エペソ2:7)。これからの世々において、キリストはさらに、これらの中身、内実を味わわせ、豊かに体験させて、その「恵み」の尽きないさまのなかに一人一人を愛し続け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
結び)「ローマ12:1-2」
2015년 12월 20일 크리스마스예배 설교 요한복음1:14
「종이 되신 아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
서문) 크리스마스, 축하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종되신 메시아가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 종이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안에 사셔야 했습니다. 아들이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셨는지를 요한은 1:1-13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셨던 「말씀」은, 14절「사람이 되어」(신개역)∙ 「인간이 되어」(공동역) ∙「육신이 되어」(원어, 문어역),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번역상으로는 「육신이 되어」가 적당합니다. 하나님 아들이 우리를 위해 그 높은 영광의 보좌로부터 「종」이 되기위해 얼마나 비천한 상태로 내려 오셨는지를 밝히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인간」이라는 원어보다는 「육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을 낮게 말할 때에는 「육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이 부패로 가득찬 오염된 우리들의 육체속으로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겸손으로 내려와 주셨습니다.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 있는 분, 인간의 인격을 비유해서 하나님 아들의 인격을 나타냈습니다. 。
성결하신 구세주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 하나님의 종으로, 「육신」 (인성)을 갖으셨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성질을 취하셨습니다. 육체와 이성적 영혼을 취하신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여성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럼으로 지혜와 신체의 면에서도 영아에서 소년으로, 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땀을 흘리고, 피로하며, 배고프고, 고통받을 가능성을 가지고 육체의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읽고, 시련을 겪으시고, 유혹 받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인간∙종으로써 스스로 순종하셨습니다.
이 육체로 가족을 위해 목수의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메시아로써의 공적 생애를 시작하신 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복음4:17)라고 각처에 선교하셨습니다. 결국에는 십자가위에서 피를 흘리시고, 몸을 찔리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장사되었습니다. 장사된 지 삼일만에 육체를 가지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일을 증명하려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40일 후에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모든 일체의 순간에 있어서, 「말씀」은 사람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으로써의 성질과 인간으로써의 성질 두가지가 완전하게 결합되어 「말씀이 육신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결합한 것인지, 그 상태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8장 제2항목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두번째 인격이신 하나님 아들은 참된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같은 본질, 또는 동등되시면서, 스스로 인간의 성질에 속한 모든 본질적 고유성과 공통적 약점을 모두 취하셨다. 하지만 죄 없는 분이셨다 그는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본질의 취하고 태에 잉태되셨다. 그곳에서 완전하게 전혀다른 두 성질, 즉 신성과 인성이 이질, 합성, 혼합되지 않고, 하나의 인격속에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있다. 이 인격은 참된 하나님, 또한 참된 인간으로써, 더욱이 한사람의 그리스도,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2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거하다」의 원어는 「천막」 치는 것. 이 말은 우리들 안에 숙영(캠프)하셨다. 「말씀」의 거하심은 일시적(약 33년간)이었지만, 환상처럼 형태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 「거하다」라는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5번 사용되고 있으며, 그 중4번은 요한계시록에 사용되지만 특히, 신천지의 모습을 (21: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고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스어 번역의 구약성경에는 「장막」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
사도바울은 이곳의 그리스도가 「종」되신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립보서2:6,7)
더욱이 자기자신을 낮추시어 명예롭지 못한 십자가의 죽음까지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탄생에 있어서도 묵을 방조차 없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로써 가난한 생활을 보내셨으며, 메시아로써 공적 생애를 시작하신 후에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을 낫게 하시면서 각처를 돌아다니셨습니다. 그런 중에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8: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철저한 종으로써의 삶이었습니다.
악령을 내쫓게 하거나, 병이 낫게 된 몇몇의 부인들은 이 가난한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으로 예수를 섬겼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전에 바쳐야 할 돈을 위해, 베드로를 갈릴리 호수에 보내 물고기를 잡게 하셔서 그 물고기의 입에서 나온 금화를 바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셨을 때에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는 무덤을 빌려 장사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당시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세리, 죄인의 한패」라고까지 불리우셨습니다. 죄인이었던 여인이 향유를 바른 것을 기쁘게 받아주셨으며, 그녀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모두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천국의 위대하고 깊은 뜻을 그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종」으로써 사시며, 마지막으로는 제자들의 발까지 닦으셨습니다.
또한 참된 의미로 예수님을 이해해 줄만한 친구가 이 지상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특이한 사명때문에 그분만큼 고독을 맛보신 분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어째서 이토록 빈곤한 상태로 지상생애를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8:9)
3 이것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1:14) 라고 쓰여있는 것처럼, 아들의 영광을 계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다」의 원어는 「관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극장」의 어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성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주의깊게 살펴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요한을 포함해, 제자들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이었습니다. 특히, 「산상 변형」의 예수를 보았습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도다」(마태복음17:2)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에 가득찬 예수를 본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공생애를 전부 봤습니다. 결론은 「아버지의 독생자」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입니다. 더욱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의 대상자에 대한 관찰과 신앙고백의 차이는 진리를 자신의 것의로 삼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 예수님은 은혜의 복음에 충만하여, 진리에 충만하여, 진실함으로 확실한 위로의 말씀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의식의 어려운 요구도, 형태나 상징이나 그림자도 아닙니다. 실존하시는 구세주입니다. 그 분이 우리들에게 주신 부요함이란 얼마나 큰 것인지!,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들을 부요하게 해주셨을까요? 主
먼저, 아들의 십자가의 대속을 받은 우리들은 영적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축복을 받아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17:22)
베드로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성질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의, 성, 아들로써의
축복, 이에 따른 높이 들리움, 영광의 부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의
상속자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로마서8:1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2:7) 이제부터 그리스도는 여러 세대에게 이것들의
의미를 깊이 맛보게 하시고 풍요롭게 체험하게 해 주셔서, 그 「은혜」를 한사람
한사람에게 넘치도록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맺음) 「로마서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