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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年12月13日 アドベント第三主日礼拝 説教(日本語文、韓国語文)イザヤ書52 音声あり


 
2015年12月13日アドベント第三礼拝

イザヤ52:13-53:12 「しもべの生涯と苦難」(パート一)

序文)52:13-53:12 旧約中の最大のメシア預言

 主イエスにたいする謙虚な信徒が、この雄渾壮大な章に接する時に取る態度を次の言葉がいみじくも表現している。「旧約聖書の中に、クリスチャンの心にキリストの贖いのみわざの預言だと思える何か一章句があるとすれば、それはあの比類なきイザヤ書53章である。われわれはそれを今日も、われらの主が十字架の上で他人の罪のために行われた贖いを述べるものとして、しばしば、新約聖書の諸章句にもまして愛読する、純朴なクリスチャンは言う。これ以上に栄光に輝いて鮮やかな預言は決してなかったと。」(聖書学者グレッシャム・メイチェン注:)
 以下の解説が正しい事は、使徒の働き8章28節以降のピリポによるエチオピアの宦官への伝道の記事に訴えることができる。宦官は馬車に乗って一人でイザヤ書53章7節以降を朗読していた。その意味が分からなかった、聖霊に導かれたピリポが彼に出会って、解き明かした時、彼は信仰に入り洗礼を受けるに至ったからである。
 この預言を聖霊に導かれなかった人々は、次のように解釈した。「彼は自分の事を語っているのだ」「彼はユダヤ民族の事を語っているのだ」「彼は、誰か偉大な宗教家のことをかたっているのだ」と。このように解釈する人々は、御霊によって生まれ変わらない限りは、「彼は来るべきキリストの事を語っているのだ」と言わない。
 さて、これからの説明は、旧約の大学者エドワード・ヤング博士に添っている事をお断りしてきたい。なぜなら、私が神学生の時以来、旧約聖書の学びに際して、E・ヤング博士の著書を無視しては、ただしい理解に達し得ないからである。
Ⅰ 52章13−15節は53書への序論になっている。53章の論述をまとめている。
1 13節「見よ。わたしのしもべは栄える。彼は高められ、上げられ、非常に高くなる。」「見よ。」預言の中心人物に注意を集中するように。「見よ。」はイザヤ愛用の言葉で、新しい主題が始まる時に常に使用している。イザヤ書で70回は使われている。皆がよく知っていることば「見よ。おとめが身ごもっている」などである。「わたしのしもべは栄える。」新改訳、口語訳「見よ。わがしもべ知恵をもておこなわん。」文語訳「 see, my servant will act wisely; he will be raised and lifted up and highly exalted.」英語訳(NIV) 「Behold my servant shall deal wisely. He shall be exalted and lifted up. And shall be very high.」(Revised Version) 
 翻訳上の課題がある。原語で用いられている動詞は、手段と目的が互恵的な用い方を示唆している意味で、目的のために最終的には「賢く」導いていることをさす。それで、「知恵をもておこなわん。」が良い。英語の訳が良い。正確に訳する事が難しい動詞といわれている。
 「意味合いは、単純に、分別または知性をもって行動する事を意味する。ところが、このような知性ある行動は、通常、成功におわるので、この動詞はまた、効果的な行動という概念を含むに至る。このようにして、しもべがきわめて賢明に働くので、豊かな実りが彼の努力の冠となる事を理解すべきである。彼のものとなる究極的成功は、適切な効果的行動をもって達成される。これは、しもべが、自分の引き受けようとする仕事に成功する、という事実の明らかな陳述である。それは、彼が自ら栄えると言う思想よりも、むしろ彼が成し遂げようと求める任務が上首尾な結末に達するということである。これこそ、預言者がわれわれに注目させる第一の思想である。なぜなら、「彼は慎重に行動する」と訳した言葉が、主語「わたしのしもべ」の前に出さえしているからである。」(ヤング)
 「わたしのしもべ」しもべを紹介しているのは、主なる神さまである。先週の説教で学んだ50:4-9では困難に会っており、受難が書かれていた。なぜ受難するかの理由は書かれていなかった。今や、52:13-53:になぜ受難するかが詳しくかかれている。
 それがしもべ自身の罪のため神に罰せられたという間違った見解をだかないために、13節と書き出している。しもべが神に所属して、自分の働きを成し遂げる事、最高度に成功の高みにまで到達する事を明らかにしている。
 13節の後半は、しもべの「高挙」を示している。三段階で高められる事が動詞の使い分けで強調されている。「たかめられ」「上げられ」「非常に高くなる」。これはピリピ2:9-11に見事に描かれている。
  
 2  14節「多くの者があなたを見て驚いたようにーその顔だちは、そこなわれて人のようではなく、その姿も人の子らとは違っていた。」
 イザヤはしもべが最高に挙げられていると言ったとたんに、対照的なしもべの姿を描いている。なぜあれだけ高挙をいうのかといえば、しもべが非常な受難に遭遇するからである。それを私たちが受け入れなければならない。しもべの上に訪れた災いにより「多くに人々があなたに驚いた」という。なぜ驚いたかといえば、「顔だちがそこなわれ、姿が人の子らと違っていた。」先に15節の翻訳の課題を解決してから、14節、15節を関連して説明する。15節の新改訳で「驚かす」と訳されている原語は「注ぐ」である。死海写本も「注ぐ」となっている。それで「多くの国々に注ぐ」と理解する。
 ここの文法上の文脈は、1 多くの者があなたを見て驚いたように、挿入句—その顔だちは、そこなわれて人のようではなく、その姿も人の子らと違っていた。前の挿入句を解説するために第二の挿入句 そのように、彼は多くの国々を注ぐ。
 2 王たちは彼のゆえにくちをつぐむ・・・。
このように文脈を知ると、この節に表明されている対照は、多くの人の驚きと、しもべの前で口をつぐむ王たちの態度との間にあるようにみえる。
 多くの者たちが彼を見たときに示した驚きに呼応して、王たちにより、その口をつぐむことにおいて示された畏敬の恐れ、しもべの贖いのわざにより生み出される畏敬の恐れがある。
 なぜ、多くの者が受難者に驚いたのか。1の挿入句 受難者がその有様が手ひどく損なわれていた、到底、人間に見えないほどであった。驚きの理由は受難者のありさまにあった。第二は、実際に損なわれていたが、そこなわれた者として多くの国々に注ぐことにより、贖いをすることを示すからである。しもべは恐ろしく損なわれているあいだに、清めの儀式を遂行する。「注ぐ」はレビ記14:7,4:6.8:11等で、洗いや清めの儀式としての水・油・血の注ぎを表すために、モーセの律法に出て来る用語がここに用いられている。祭司の注ぎの儀式を理解するならば、ここでしもべが行う「注ぎ」は祭司としての役目である事が理解される。多くの国々を自ら祭司としてしもべは水や血を注いで清める。受難者の受難は贖罪的な清めのためであった。
 3 15節「彼らは、まだ告げられなかった事を見、まだ聞かなかったことを悟るからだ。」しもべに関するこの使信は全く新しいものである。主キリストによる救いの絶対的な新しさという概念がここに言われている。イザヤ64:4,第一コリント2:9.参照。

Ⅱ  53章 ゴルゴタ
1 1節 「私たちが聞いたことを、だれが信じたか。主の御腕は、だれに現れたのか。」この預言者の問いかけは、誰も信じなかったというのではなく、信じる者の少なさを暗示している問いかけである。広い世界に真の信徒の少なさに注意を引いている。しもべとその運命とについて述べた使信は、奇妙なものである。それを聞いた王たちは信じた。しかしこのように信じる点で、全ての人が従ったわけではない。大部分の人々は、この使信に何の注意も払わなかった。実に信じた人は少ししかいない。
 非常に明白なしもべの使信であるが、聞く誰もが信じることを拒むのは、なぜか。聞いた人々でも、無視しないまでも軽んじるのである。並行して、同じ思想が強められて「主の御腕はだれに、現れたのか。」と述べられている。わずかの者にしか、主の御腕は現されない。聖霊のお働きがその心のうちに行われるものはわずかである。しかし、いないわけではない。宣教の熱心を失わないように。
 2 2節 「彼は主の前に若枝のように芽生え、砂漠の地から出る根のように育った。彼には、私たちが見とれるような姿もなく、輝きもなく、私たちが慕うような見栄えもない。」
 ここから、しもべの生涯が、「謙卑」(ヒュミリエーション)の生涯である事を示している。イザヤ11:1「エッサイの株から一つの芽がで、その根から一つの若枝が生えて実をむすぶ。」という言葉と比較される。かわいた地で根が生え出るためには困難と戦わなくてはならない。渇いた地は成長を約束してくれるわけではないから。救い主が地上に現れなくてはならなかった場合の低い状態を示している。しもべは姿も見栄えもない。慕うべき外見もない。イケメンではない。これはキリストの肉体的な外見をいっているのではない。新約聖書にはキリストの外見は何も書かれていない。人々の注意と尊敬を引きつけるに、望ましいような性質は無い。しかし彼のもので、しかもきわめて大規模に彼のものであったあるものがあった。それは3節。
3 3節「彼はさげすまれ、人々からのけ者にされ、悲しみの人で病を知っていた。人が顔をそむけるほどさげすまれ、私たちも彼を尊ばなかった。」
 しもべの謙卑をさらに詳しく述べる。彼は人々から侮辱された。人々は彼に反応した。無視したのではなかった。侮辱したのである。
 「さげすまれ」「ぶじょくされ」「悲しみの人で」「顔をそむけ」「尊ばなかった」。どんどん低くなりつづけるしもべ。嘲笑と罵倒を浴びせた。のけ者 人々がその好意と尊敬とを撤回する者とされた。救いをもたらすために彼は人々に捨てられた。
 「悲しみの人」彼は「人」である。彼の全生涯は苦痛と悩みに覆われ、それに耐えておられることに救い主の特異性がある。悲しみを見いだす生涯である。」「病」を知っていた。「病」とは、実際に次々と病になったという意味よりは、罪を描く一つの比喩的表現である。イザヤはユダの罪深い状態を1:5Bから6節に、肉体的な病気の用語で示している。しもべが成し遂げる解放が、肉体的な悲痛な病気からの解放でなく、むしろこのような病気が流出する源、すなわち罪からの解放である。
 われわれも彼を侮った。彼を無価値の人と見た。
 主イエス様は ルカ18:31-33で、この節を引用しながら、12弟子たちにご自分の十字架に向かう様子をかたられました。弟子たちは何一つ理解できなかったと書いております。
  5 5節「しかし、彼は、私たちの罪のために刺し通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彼の打ち傷によって、私たちはいやされた。」
 事柄の真相はこうである。身代わりの贖罪の明快な陳述がある。この節は全てのクリスチャンにとってもっとも高価な節である。「刺し通され」によってしもべが外部から災難を受けた。この表現は死んだ事を意味する。ヨハネ19:34[兵士のうちの一人がイエスのわき腹を槍で突き刺した。すると、ただちに血と水が出て来た。] われわれの不義と罪が、彼を砕いた。神との平和が、これ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神への罪や違反は、どれほど平安をなくすかを思わなければならない。神と私たちの間にある障壁は、しもべの身代わりの死によって取り除かれた。
 われわれはいやされたのだ。この宣言により、しもべを死なせる原因となった事から、私たちは完全に自由にされた。ローマ4:25「主イエスは、私たちの罪のため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たからです。」
結び)しもべの十字架の上の苦難を、次主日のクリスマス説教を挟んで、つづけてまなびます。

2015년 12월 13일 어드벤트 제3예배 이사야 52:13-53:12
「종의 생애와 고난」(파트)

서문) 52:13-53-12 구약성경 최대의 메시아 예언
 주 예수님앞에 겸허한 신도가 이 웅대한 장을 접할 때 취하게 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은 말로 적절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중 크리스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업적에 대한 예언이라 추측할 수 있는 문구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이사야53장이다. 우리는 오늘도 그것을 우리들의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타인의 죄를 위해 대속하신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종종 신약성경의 각 장구를 애독하는 소박한 크리스챤은 말한다. 이것 이상으로 가득한 영광으로 선명하게 예언한 것은 결코 없었다.」 (성경학자 그레샴∙메이첸 주:)
 이하의 해설이 틀림없음은, 사도행전 8장28절 이후의 빌립보가 에디오피아의 관헌에게 전도한 기사로 증명 할 수 있다. 관헌은 마차를 타고 혼자서 이사야 53장 7절 이후를 읽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성령의 인도로 그는 빌립보를 만나, 설명을 들었을 때, 그는 믿음의 길로 들어, 세례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이사야의 예언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그는 자신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유대민족의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 위대한 종교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는 다시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부터의 설명은, 구약의 대학자 에드워드∙영 박사에 따르려 한다. 왜냐하면, 내가 신학생시절 이후, 구약성경을 공부할 때, E∙영박사의 저서를 무시라고는 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Ⅰ 52장13-15절은 53장의 서론이다. 53장의 논술을 정리하고 있다.

1 1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보라」 예언 중심인물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 「보라」는 이사야가 잘 사용하는 말로써, 새로운 주제가 시작될 때 언제나 사용하고 있다. 이사야에서 70번 사용되고 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등이 있다. 「내 종이 형통하리니」 신개역, 구어역 「보라 내 종이 지혜롭게 행하리니」 문어역 「see, my servant will act wisely; he will be raised and lifted up and highly exalted.」 영어역(NIV)「Behold my servant shall deal wisely. He shall be exalted and lifted up. And shall be very high.」(Revised Version)
 번역상의 문제가 있다. 원어에 사용되고 있는 동사는, 수단과 목적이 호혜적 방법을 암시하는 의미로, 목적을 위해 최종적으로 「지혜롭게」 인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으로 「지혜롭게 행하리니」가 적당하다. 영어의 번역이 알맞다. 정확하게 변역하는 것이 어려운 동사로 알려져 있다.
 「의미는 단순하게 분별, 또는 지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성있는 행동은 언제나 성공으로 끝마치므로, 이 동사는 또한 효과적 행동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종이 대단히 현명하게 일하므로, 풍성한 열매가 그의 노력의 관이 됨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가 얻게되는 궁극적 성공은 적절한 효과적 행동으로 달성된다. 이것은 종이 받게 될 일을 성공시키다, 라는 사실의 명백한 진술이다. 그것은 그자신이 형통하게 된다는 의미보다는 반대로, 그가 성취하려는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예언자가 우리들에게 주목시키려는 첫번 사상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중하게 행동하다」라고 번역된 말이, 주어 「나의 종」의 앞에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영)
 「나의 종」 종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여호와되신 하나님이다. 지난주 설교, 50:4-9에서는 수난이 쓰여 있었다. 어째서 수난당하는지 이유는 쓰여있지 않았다. 지금 이곳의 52;13-53에 어째서 수난당하는지 이유가 자세히 적혀있다.
 그것이 종 자신의 죄로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잘못된 견해를 갖지 않도록, 13절에 적혀있다. 종이 하나님께 소속되어, 자신의 일을 달성하는 것, 최고도의 성공에 달성하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13절 후반은 종의 「존귀」를 나타내고 있다. 동사를 구분하여 사용함으로써, 3단계로 높여지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받들어」「높이 들려」「지극히 존귀하게 되다」. 이것은 빌립보서2:9-11에 훌륭하게 그려지고 있다.
  
 2 14절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이사야는 종이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이라 말한 바로 뒤, 대조적인 종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째서 그토록 높이 들려지는가 하면 종이 대단한 고난을 맞게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종의 위에 임한 재난으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먼저, 15절의 번역상 문제를 해결하고, 14절, 15절을 관련시켜 설명하겠습니다. 15절의 신개역으로 「놀라게하다」라고 번역되어있는 원어는 「기름을 붓다」이다. 사해사본에도 「기름을 붓다」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수많은 국가에 기름을 붓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곳의 문법상 문맥은, 1 무리가 당신을 보고 놀란 것처럼, 삽입구-그 얼굴들은 상처로 사람과 같지 않고, 그 모습도 사람과 같지 않았다. 앞의 삽입구를 해설하기 위해 제2의 삽입구 그렇게, 그는 많은 국가들을 기름부었다.
 2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렇게 문맥을 알면, 이 절에 표명되고 있는 대조는 많은 사람들의 놀람과 종 앞에 입을 다문 왕들의 태도사이에 보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반응한 놀라움에 호응하여, 왕들의 입을 다문 것에 대한 경외의 두려움, 종의 대속의 업적보다 경외의 두려움이 나타나고 있다.
 어째서 수많은 사람들이 수난자를 보고 놀라는가? 1의 삽입구 수난자의 모습이 심하게 상했다.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놀람의 이유는 수난자의 모습이었다. 두번째는, 실제로 상해있었지만, 그 상한자로써 수많은 나라들을 기름부음으로, 대속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종이 심하게 상해있던 사이에, 정결의 의식을 수행한다. 「기름을 붓다」는 레위기 14:7,4:6,8:11등에 닦는 것이나 정결의 의식으로써 물∙기름∙피를 붓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모세율법에 나오고 있는 용어가 이곳에 사용되고 있다. 제사장의 부음의 의식을 이해한다면, 이곳에서 종이 행하는 「기름부음」은 제사장으로써의 역할임을 이해할 수있다. 수많은 나라들을 제사장으로써의 종이 물이나, 피를 부어 정결케 한다. 수난자의 수난은 속죄적 정결을 위한 것이었다.

 3 15절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종에 관한 이 사신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절대적 새로움이라는 개념을 이곳에서 말하고 있다. 이사야64:4, 고린도전서2:9참조.

Ⅱ 53장 골고다
1 1절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이 예언자의 물음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믿는자가 적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넓은 세계중에 참된 신도의 적음을 주의하고 있는 것이다. 종과 그 운명에 대해 진술한 사신은 기묘한 것이다. 그것을 들은 왕들은 믿었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신을 주의하지 않았다. 진실로 믿게된 사람은 조금밖에 없었다.
 대단히 명백한 종의 사신이지만, 들은 사람 누구도 믿는것을 거부하는 것은 어째서일가? 들었다 하더라도, 무시는 하지않더라도 가볍게 여긴다. 병행하여, 같은 사상이 강조되어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라고 기록되어 있다. 얼마 안되는 사람에게 여호와의 팔이 나타난다. 성령의 일하심이 그 마음속에 일하게 되는 것도 얼마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없는것이 아니다. 선교의 열심을 잃지 않도록.
 
2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곳에서부터 종의 생애가 「겸비」(humiliation)의 생애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사야11: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는 말과 비교된다. 마른 땅에 뿌리가 나기위해서는 곤란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마른 땅은 성장을 약속해주는 것이 아니므로. 구세주가 지상에 오지 않으면 안되었던 낮은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종은 모습도 돋보이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모일만한 겉모습도 아니었다. 잘생기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육체적 외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의 겉모습에 대해 어떤 기록이 없다. 사람들의 주의과 존경을 끄는데 필요한 성질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대규모의 것이 있었다. 그것은 3절.

3 3절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종의 겸비를 더욱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반응했다.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멸시한 것이었다.
 「멸시하다」 「모욕당하다」 「간고를 많이 겪다」 「얼굴을 돌리다」 「귀히 여기지 않다.」 점점 비천해지는 종. 조소와 매도를 받었다. 따돌림을 받았다. 사람들의 호의와 존경을 철회당하는 자가 되었다. 구원을 얻게하기 위해 그는 사람들의 버림을 받았다.
 「간고를 겪는 자」 그는 「사람」이었다. 그의 전생애는 고통과 고난에 싸여, 그것에 견딜수 있는 것이 구세주의 특이성이다. 슬픔을 만들어내는 생애였다. 「질고」를 알고 있다. 「질고」란, 실제로 많은 병에 걸렸다는 의미보다는, 죄를 그리는 하나의 비유적 표현이다. 이사야는 유대인이 저지른 깊은 죄의 상태를 1:5B에서 6절에, 육체적 병의 용어로 나타내고 잇다. 종이 이룬 해방이, 육체적 비통한 병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이러한 병을 유출시키는 근원, 즉,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우리들도 그를 멸시했다. 그를 무가치한 사람으로 여겼다.
 주 예수님은 누가복음 18:31-11에 이 절을 인용하면서 12제자들에게 그분이 십자가를 향할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쓰여있습니다.
 
5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건의 참 모습은 이러하다. 대속의 명쾌한 진술이다. 이 절은 모든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말씀이다. 「찔림」으로 인해 종은 외부로부터 환난을 입었다. 이 표현은 죽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19:34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우리들의 불의와 죄가 그를 상하게 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이것으로 가져지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죄나 위반이 얼마나 평안을 사라지게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있는 장벽은 종이 대신 죽어주심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 이 선언으로, 종을 죽게한 원인으로부터 우리는 완전하게 자유롭게 되었다. 로마서4: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맺음) 종의 십자가의 고난을 다음주 크리스마스 설교를 포함하여 계속해서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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