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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年10月8日 礼拝 説教(日本語文、韓国語訳)


 
2017年10月8日マタイ福音書5:7 「あわれみ深い者の幸い」招テトス3:5

序文)主イエス・キリストさまが、私たち贖われて、神の子としてくださった者たちの、日常生活を導き整えて恵みと支えを増し加えて下さっているのには、一人一人に対する目的がある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様に似る者となるというゴールです。それはとりもなおさず、小さいキリストとするための、「存在と行為」に関わってくる聖霊の助けに自覚的に預かることになるのです。まず、新しく生まれ変わらせて下さるところからはじまるので、存在が先に取り扱われているのです。罪深い滅びの子と言う存在から、聖霊による神の子としてうまれかわった存在としてクリスチャンはスタートしたのです。存在が取り扱われて、次にその上で行為が関わってくるのです。

「幸いだなあ」と言われている一つ一つは、特に存在のありようにかかわる幸いについてはなされているのです。「義に飢え渇いている者の幸い」を先回学びましたが、次に今朝は「あわれみ深い者」といわれます。義だけで、あわれみがなければ大変に律法主義的になり、冷酷無情のそしりを免れえません。一方、あわれみだけで、義がなければ、人間は無分別な罪に陥りやすくなります。ですから、義とあわれみは常にセットで分離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Ⅰ 「あわれむ」ということばの意味は「慈悲、仁慈、気の毒に思う心」などをさします。反対は「無慈悲、残忍、無情、冷酷無視」などでしょうか。

あわれみ深い実例としてイエス・キリストさまが語られた例話はルカの福音書10:25-37に登場する、良きサマリヤ人です。「あわれみをかけてやった人はだれか」同情以上のことを、ただ可哀想にとおもうだけではない。やみがたいおもいから実際に骨折りをした。そのとらわれの状態から解放するために何かをした。人の不遇、苦しみ、不幸、悲しみ、に対して心から同情心を寄せて具体的に神様の愛の行為をあらわした。

このようなあわれみの源は神さまにあります。神は義なるお方であります。しかし同時にあわれみ深いお方です。次のようなおことばが証明しています。「あなたがたの天の父があわれみ深いように、あなたがたもあわれみ深くしなさい」(ルカ6:36)。「私たちが滅びうせなかったのは、主の恵みによる。主のわれみは尽きないからだ」(エレミヤ哀歌3:22)。「神は私たちが行った義のわざによってではなく、ご自分のあわれみのゆえに聖霊による新生と更新との洗いをもって、私たちを救ってくださいました」(テトス3:5)。

神が私たち罪人の悲惨な状態をみて、その哀れと苦しみをご覧になった。神のみこころを破り、そむき、自分で自分に裁き招き、永遠の滅びに突き進んでいました。神はそのあわれみの心を動かされ、尊いひとり子イエス・キリストをこの世に遣わされました。イエス様を信じる信仰はこのあわれみ深い行動の上に成り立っています。教えとしてのあわれみでは無くて、行動にあらわれているあわれみです。「主はわれらの父祖たちにあわれみを施し、その聖なる契約を、われらの父アブラハムに誓われた誓いを覚えて、我らを敵の手から救い出し、我らの生涯のすべての日に、きよく、ただしく、恐れなく、主の御前に仕えることを許される」(ルカ1:72-74)。

イエス・キリスト様は地上生涯を歩んでいるときに「群衆を見て、羊飼いのない羊のように弱り果てて倒れている彼らをかわいそうに思われた」(マタイ9:36)。

主は悲しむ者を慰め、飢えている者に食べさせ、病気にかかって苦しんでいる者、盲人、足のきかない者、口のきけない者を癒やし、死んだラザロを生き返らせ、ヤイロの娘を生き返らせることもされた。主のあわれみの心は十字架の上からも示され「父よ。彼らをおゆるし下さい。彼らは何をしているのか分からないのです」(ルカ23:34)と祈りゆるされました。

 

Ⅱ  使徒パウロが受けたあわれみについて

第一テモテ1:12-17に詳しく振り返って書いています。以前に朴柱炫先生がなさった説教から引用します。

「 13節ではパウロは、以前は神をけがす者、迫害する者、暴力をふるう者だと告白しています。神をけがす者に使われている言葉は障害を与える意味で、冒涜する意味の言葉が使われています。暴力をふるう者は高慢な者で他の人を迫害する者です。パウロは以前、自分がキリスト者にどんな者で、何をしたかを迷わずに告白しています。 パウロは自分の恥ずかしい過去を話すことにより、人々から嘲笑を買うことがあるにもかかわらず、隠すこと無く正直に告白したのは自分の無価値を自ら認めるのと同時に神様のめぐみの偉大さを強調するためです。エリートの中でエリートであったパウロが、福音に出会ったことでそこまで 変わったのです。彼はキリスト者を妨げることや迫害することが、神様のための正しく道であると信じました。彼は神様の御心を分別できない暗黒な状態でありました。霊的な無知による過ちでしたが、それによって裁きを受けることではなく、神様のあわれみを受けたとパウロは告白しています。

パウロは大きな罪人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キリストが施しためぐみのゆえに救われたのは全ての人々が確かに分かる必要がある事実だと告白しています。それで、パウロは「キリスト・イエスは、罪人を救うためにこの世に来られた」ということばは、まことであり、そのまま受け入れるに値するものだと告白しています。これはキリスト教の一番大切な事実で、福音の本質がよく要約されているところです。罪人を救うためにキリストがこの世に来られたことは全ての人々に良い知らせであります。なぜならば、聖書には義人は一人もいないと宣言しているからです。すなわち、全ての人々は罪人であることです。

ですから、キリストはすべての人々のためにこの世に来られたことです 。しかし、人々は最後まで自分が罪人であることを認めることを拒むことで、滅びに至っています。その責任が神様にあると叫びながら滅びに至っています。パウロは自分がその罪人のかしらだと告白しています。それは自分が一番悪い罪人であ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この告白は健全でない非現実的な謙遜で、形だけの表現でしょうか。そうではありません。パウロは神様のめぐみを知れば知るほどに自分の惨めな姿と同時に神様の偉大さに圧倒された告白であります。特に、パウロはここで意図的に現在形動詞を使っています。

パウロが改心してから何年に過ぎたが、今も自分の昔の過ちを深く悔い改めしている姿です。パウロはいつも自分が赦された罪人であることを忘れ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です。ですから、自分が一番悪い者と宣言しているのです。それは一番悪い者だから一番多く赦された者だと意識しています。パウロは自分に対する神様の憐れみと赦しが、どれくらい深いものであるかをよく理解していました。神様の憐れみと赦しが、どれくらい深いものであるかを理解する分だけに自分の罪と本当の姿が分かるようになります。ですから、パウロはこのように告白しているのです。パウロは続けて16節では自分があわれみを受けたのはキリストのこの上ない寛容を示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と告白しています。

それは大きなキリストの愛のゆえです。キリストが長い間、忍耐を持って待っ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キリストの忍耐が無かったら今のパウロは存在しないことです。もうとっくに、神様の怒りによる裁きを受けたのです。しかし、キリストの長い忍耐がパウロを救ったのです。それは一番悪い罪人であるパウロが救いのあわれみを受けたのは、長い忍耐を持ってくださったキリストの愛があったからです。それは、今後、キリストを信じて永遠のいのちを得ようとしている人々の見本になるためだと告白しています

最後にパウロは「世々の王、すなわち、滅びることなく、目に見えない唯一の神に、誉れと栄えとが世々限りなく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と神様に栄光の賛美でこの節を終わりにします。この世の王とは違い永遠である唯一の神様に全てがあることを宣言しています。それは、神様の絶対的な主権の下にいることを現す宣言であります。

 

私たちは例外なしに、このあわれみを受けています。「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わたし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ことにより、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身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ですから、今すでに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彼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さらのことです」(ローマ5:8-9)。

このあわれみを自分のものとしてください。

そのとき私たちはキリストにあってあわれみを受け、あわれみの何であるかがわかり、他の人に対してあわれみを現すことができる者となれるのです。

 

Ⅲ わたしたちがあわれみ深く行為を示していくと、約束があります。主は「あわれみを受けるから」といわれました。この意味は、「もし私が他の人にたいしてあわれみふかいなら、神も私に対してあわれみ深い」というの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はなく、神のあわれみを受けた者は、そのあわれみを土台として、あわれみ深い者となるということです。神のあわれみを受けた者は、他の人を見るとき、今までのように見ないで、神がその人をごらんになっているように見る。罪とサタンとこの世の生き方に惑わされて、その犠牲にされ、罪の奴隷となっている者、同情されるべき人、神のめぐみとあわれみがなければ自分がそのような人であったことを思い出す。その上で彼らをあわれみ深く見る。祈る。救いに入ってくれるようにと、主に取りなしていく。人をあわれむ目、耳、足をもつ。主イエスはあわれみを求めてさけぶ者の声を聞いてくださっている。マルコ10:46に登場する、生まれながらの盲人バルテマイが、道ばたでイエスが通られると聞いて「ダビデの子のイエスさま。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と叫び、弟子たちは黙らせようとして大勢でたしなめたりしたが、彼はますますあわれみをと叫んだ。ついに聞いていただけた。彼は癒されて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弟子たちは、主イエスさまが持っておられるあわれみの耳がない。あわれみの目がない。行動がなかった。私たちは主からあわれみを受けたのだから、人をあわれむ目、耳、足をもちましょう。神さまのために、あらゆる方面で他の人の痛手をなぐさめ、助け、いつくしみ深い手をもちましょう。

 

結び)主の手には十字架の傷跡、あわれみの傷跡があります。主の足は福音をガリラヤとユダヤ全土に運ぶためにもちいられました。わたしたちの足は全世界に福音を運ぶための伝道者の足になりましょう。

そのような人は主からあわれみを受けます。

 

2017 10 8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초대의 디도서3:5

 

서문)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 아들로 삼아주시고,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하심을 더해 주시는 것에는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자로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작은 그리스도로 만들기 위해서는, 「존재와 행동」에 관계되는 성령의 도움을 자각하고 맡기는 것으로부터 가능합니다. 먼저, 우리를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신 것으로부터 시작되므로, 존재가 먼저 다뤄집니다. 죄로인해 죽을 수 밖에 없던 우리들의 존재로부터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존재로써 크리스챤은 시작됩니다. 존재가 다뤄지면 다음으로 행위가 관련되게 됩니다.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한가지한가지는 특히 존재에 관련된 축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를 지난 주 배웠지만, 다음으로 오늘 아침은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의만 있고, 긍휼이 없다면 대단히 율법적으로 되며, 냉혹무정함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한편으로, 긍휼만 있고, 의가 없다면, 인간은 무분별의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의와 긍휼을 언제나 같이 생각하는 것으로써,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말의 의미는, 「자애, 인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반대로는 「무자비, 잔인, 무정, 냉혹무시」 등이 될 수 있습니다.

긍휼함의 예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누가복음 10:25-37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는 누구인가?」 동정이상의 일은 그저 불쌍하다는 마음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흘러 나오는 마음이 있어야 수고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묶여 있는 상태를 해방시켜 주기위해 무언가를 했습니다. 인간의 불운, 고생, 불행, 슬픔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동정심을 갖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를 나타냈습니다.

이러한 긍휼의 원천은 하나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누가복음6:36)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예레미야 애가 3:22)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3:5)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된 비참함을 보시고, 그 불쌍함과 괴로움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이 움직여, 고귀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이 깊은 자비의 행동위에 성립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으로써의 자비가 아니라, 직접 행동을 통한 자비입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누가복음1:72-7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생애에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태복음9:36)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고, 주린자를 먹이시고, 병든자, 맹인, 걷지 못하는 자, 벙어리를 고치시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며,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자비의 마음은 십자가 위에서도 나타났는데,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23:34) 라고 기도하며 용서하셨습니다.

 

Ⅱ 사도바울이 받은 자비에 대하여

디모데전서1;12-17에 자세하게 쓰여있습니다. 이전에 박주현 선생님이 하신 설교를 인용하겠습니다.

「13절에 사도바울은, 이전에는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 핍박하는 자, 포행하는 자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라는 말은 장애를 거는 의미로써, 모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포행하는 자는, 거만한자로써, 다른 사람을 박해하는 자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전에 크리스챤에 대해 어떤 자였으며, 어떤 일을 했는지를 망설임없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고백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게될 것도 알고 있으면서도 숨김없이 고백한 것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자기자신이 고백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그가 복음을 만나자 그 순간부터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크리스챤을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올바른 일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분별하지 못하는 암흑상태에 있었습니다. 영적 무지로 인한 잘못된 행위였지만 그것으로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사도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베풀어 주신 은혜로 구원받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는 사실이라고 고백하고 있ㅅ브니다. 이것으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라는 말씀이 진실이며, 그대로 믿을 만한 가치있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크리스트교의 가장 중요한 사실로써, 복음의 본질이 가장 잘 요약되어 있는 곳입니다. 죄인을 구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좋은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지막가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여 멸망에 이르고 됩니다. 그 책임이 하나님게 있다고 외치면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가장 나쁜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건전하지 않은, 비현실적 겸손으로, 형식적인 말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자신의 비참한 모습과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함에 압도되어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사도바울은 이곳에 의도적으로 현재형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개심한 후 몇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깊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이었음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악한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장 악한 죄인이므로, 가장 많이 용서받았음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얼마나 깊은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이해하는 만큼, 자신의 죄와 참된 모습을 알게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으로 16절에 자신이 자비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크리스도의 커다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가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인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바울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아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길고 긴 인내가 바울을 구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괴수였던 바울이 구원의 자비를 받은것은 오랫동안 인내를 갖고 계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후,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사람들의 본보기를 위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어다 아멘」이라고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으로 이 절을 끝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아래에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모두 이 자비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로마서5:8-9)

이 자비를 자신의 것으로 삼읍시다.

그럴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자비를 받고, 자비가 무엇인지를 알게되고, 타인에 대한 자비를 드러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자비의 행동을 보이게 되면 그에 따른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의미는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면 하나님도 나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는 그 자비를 토대로 해서 깊은 자바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지금까지 사람들을 본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보고계시는 것처럼 보게 됩니다. 죄와 사탄과 이 세상의 삶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것에 희생이 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 동정받기 마땅한 사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없었다면 자신도 그와 똑같았음을 기억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봅니다. 기도합니다. 구원받을 수 있도록 중보기도 합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눈, 귀, 발을 갖습니다. 주 예수님은 자비를 구하는 자의 외침을 듣고 계십니다. 마가복음10:46에 등장하는 태어나면서 맹인이었던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듣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치자, 제자들이 잠잠케 시키려 하자 그는 더욱 소리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치유를 받아 눈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주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던 자비의 눈이 없었습니다. 자비의 눈이 없었습니다. 행동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자비를 받았으므로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눈, 귀, 발을 갖도록 합시다.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면에 있어서, 타인의 아픔을 위로하고, 돕고, 긍휼히 여기는 깊은 자비의 손을 갖읍시다.

 

맺음) 주님의 손에는 십자가의 상처, 자비의 상처가 있습니다. 그 분의 발은 갈릴리와 유대 모든 땅으로 복음을 옮기는데 쓰였습니다. 우리들의 발도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발이 되도록 합시다.

그러한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자비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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