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年2月5日 エペソ4:31−5:2 「神にならう者」
エペソ 5:1-2「ですから,愛されている子どもらしく、神にならう者となりなさい。また、愛のうちに歩みなさい。キリストもあなた方を愛して、私たちのために、ご自身を神へのささげ物、また供え物とし、香ばしいかおりをおささげになりました。」
序文)「愛されている子どもらしく、神にならう者となりなさい。」(5:1)。これが世界中で最も高い規準であることは誰もが気づくと思います。パウロは、他の手紙では決して言おうとしなかったような、気も遠くなるような規準をクリスチャンたちに提出しています。可能なのでしょうか?
1 糸口として、「愛されている子どもらしく、」という点を考えてみましょう。
一人一人は神に愛されている子どもである。親に愛されていると感じるこどもたちは,自分の両親の良いところを見習うものとなります。よく「うちの子は親の良い点は引き継がないで、悪い点ばかり見習ってがっかりさせられます。」と少し控えめに話されます。もちろん本気でそう思っているのではないと分かっていますが、愛を込めて育てた子どもたちは、必ず親の良い点を見習って、それらを身に付けているものです。悪い点も見習いますが、良い点の方が多いのではありませんか。
第一私たちは自分の子どもに色々の場合、どう考え、どう振る舞い、何を経験をさせようかと対面するとき無意識のうちに、自分の親たちがどうしてくれたかを思い出して、その嬉しかったことや楽しかったことを、自分の子どもにも与えてあげようとするものです。方法手段は違っていても同質の経験を分かとうとするでしょう。
人間の場合、悪い点も引き継ぐ事がありますが、今日の聖句では「神に愛されている子どもらしく、」という視点から勧められています。天の父なる神に愛されている私たちというのです。その経験、思い出、これらのことは,すべて相働き益となるというのですから、良い点ばかりといえるでしょう。たしかにかつては「生まれながらに,御怒りを受けるべき子ら」でしたが、今は「憐れみ豊かな神が、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その大きな愛のゆえに」聖霊のお働きを受けて、神に愛されている子、光の子として歩んでいます。憎まれて、とがめられて、滅びる子としてではなくなった。愛されて、守られて、励まされて、力強く成長してゆく子となっているのです。だから 神にならう者になりなさい。
2 神の何にならうのか。神の赦しの愛にならいなさい。神の標準は高い。創造主にならうことはできない。しかし、ここでは赦しの愛にならいなさい。
ならうーまねる、なぞる、私たちも神がなさったようにまねをする。何事も、お手本に見習う事が弟子の上達するための基本訓練です。
神が赦してくださったように、私たちも赦してみよう。ときには犠牲をはらって赦してみよう。そうするときに、私たちは神にあって愛の人になってゆく。そのようなことが出来ないと心をかたくなにしている間は、たしかに出来ない。その結果自分や家族や、様々な人間関係ににがい根がどんどんはえて苦しみが増し加わる。やってみよう。決断しよう。
なぜならわたしたちは神に習う事ができるように、神のかたちに 似るように創造されたからである。また神のみたまが宿っているからである。さらに、めぐみにより、神の子とされ、神に似た者となる事ができるゆえに、神が生まれ変わらせてくださったのだから。
「愛にあってあゆみなさい。」キリスト者は自分自身の生活の中で、神の愛となさけ深さと、赦しと憐れみの態度を模倣して再現しなければならない。
マタイの福音書 18章21-35節
ペテロが質問をイエス・キリストさまにしました。「主よ。兄弟が私に対して罪を犯した場合に幾度まで赦すべきでしょうか。七度まででしょうか。」イエス・キリストは応えました「七度を七十倍するまでといいます。」
ペテロはどれくらい失敗を重ねてきたでしょうか。私たちはどうでしょうか。数えられるようなものでしょうか。そうではありません。数えられないくらい失敗をしてきました。また今もしています。主が七度を七十倍する回数だけ赦せば、あとは赦さなくてもよいと言われたのでしょうか。そのように私たちを主が扱われたらどうなることでしょう。
ここで「七度」と言われている「七」は完全数といわれており、「七十倍」とは無限の数の比喩的表現であることを知ってください。赦しは数によってではなく、それと違うものによって左右されるのです。それでイエス・キリストは、ここのところで,一つのたとえ話をされました。
中心的教えは次のようなことです。クリスチャンと公言している者が,自分に対して罪を犯した者にどのような態度を取るべきか。それは,神が私にとても計算できない罪の負債を赦してくださったのであるから、私に罪を犯した兄弟を心から赦さ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罪は私の赦された罪に比べれば無に等しい。私たちの梅列記の心はむしろ、神に対する私たちの罪を最小限に評価し、私たちに対する他の人の罪を大きく誇張し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の結果エペソ5:31[無慈悲、憤り、怒り、叫び、そしりなどを、いっさいの悪意]をその人や、人々に向けてはきかけ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無慈悲」原語 ピクリア 「和解の要求を拒否する。根に持った恨みがましさ」
自分のうけた侮辱とか、危害とか、軽視をじっと胸にだき,怒りを温存し増長させている。
にがい思い。キリスト者は忘れる方法を神に祈ろう。
この思いから憤りや怒りが生じる。
「憤り」スーモス わらが燃えるときの炎のような怒り。ぱっと燃えてすぐに治まる
「怒り」オルゲー 習慣的で執念深い怒り
「叫び」クラウゲー 怒っている人の感情の爆発が声になった場合
「そしり」ブラスヘミアー 中傷、侮辱、悪口
これらすべては「悪意」カキア から出て来る
これら異教徒の特徴であるものを捨て去れ!
クリスチャンとして、新しく生まれた者として,聖霊の助を得て神にならう者隣、赦しの心を発揮しよう。そのために「主の祈り」は、となえられるのではなく、実行されるべきなのです。
マルコの福音書11:25「立って祈っているときも、だれかに対して恨み言があるなら、赦してやりなさい。そうすれば、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も、あなたがたの罪をゆるしてくださいます。」神に赦されていない祈り手は、子当てをえられない。という点があるのですね。ですから、イエス・キリスト様はこのような警告を与えられました。「他の人を赦すことを故意に拒否している者は、どのような人であっても、効果のある祈りをすることはできない。」口先で祈ることができるかもしれないが、祈りの答えを確信することはできない。
故意に赦すことを拒否している者は,祈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て、祈りを放棄してしまいます。祈りは聞かれないと確信します。まさにそのような祈りは神にとどかないのです。
愛されている子どもらしく神にならいなさい。そうして信仰の呼吸を回復しましょう。不信仰のにがい根がはえて、自分や家族や兄弟姉妹との関係を,どんどん破壊し苦しみを増し加えてゆかないためにも、神の愛の原点に立ち返りましょう。
赦すことで習う者となるだけでなく、積極的に「愛のうちを歩みなさい。」と勧められています。現実生活の中で愛を現してゆくように「第一コリント13:4-7」。このポイントは5:後半から積極的にでてきますので、その時にゆずります。
結び:まとめてみると、私たちは「神にならう者」になれるでしょうか。
「なれる」のです。なぜなら ① 私たちは、神のかたちに似せて創造された人間なのですから。コロサイ 3:9-10「あなたがたは、古い人をその行いといっしょに脱ぎ捨てて、新しい人を着たのです。新しい人は、造り主のかたちに似せられてますます新しくされ、真の知識に至るのです。」② 私たちの内に、助け主である神の御霊が宿っているから。③ めぐみにより、神の子とされ、神に似た者となるように、神が生まれ変わらせてくださったのだから。古い人は死んでいる。新しい人は、今、生きている。
だから祈りを込めて、神にならってみよう。自分の生活の中で、神の愛と情け深さと赦しに態度を再現してみよう。
2017년 2월 5일 에베소서 4:31-5:2 「하나님을 본받는 자」
에베소서5:1-2「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서문) 「사랑입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5:1)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기준임을 누구도 알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결코 말하지 않았던, 근접할 수 조차 없는 기준을 크리스챤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1 해결책으로써, 「사랑을 입은 자녀」라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부모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자란 어린이는 자기 부모의 좋은 점을 배우려고 합니다. 「우리집 애는 부모의 좋은 점은 안 닮고 나쁜 곳만 닮았어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물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알고 있지만, 사랑으로 키운 자녀들은 반드시 부모의 좋은 점을 닮아 몸에 익힙니다. 나쁜 점도 배우지만 좋은 점이 더 많지 않을까요?
우리는 여러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며, 어떤 경험을 겪게 할까 생각할 때 무의식 중에 자기 부모가 자신에게 어떻게 해 주었는지 떠올려, 기뻤던 일이나 즐거웠던 일을 자녀들에게도 해주려 합니다. 방법이나 수단은 다르지만 같은 경험을 겪게 해주려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우 나쁜 점도 물려받을 수 있지만, 오늘 말씀은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라는 시점에서 권장하고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 경험, 기억, 이것들 모두를 선으로 바꾸어 주시기 때문에, 좋은 점만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과거에는「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지금은「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성령의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 빛의 자녀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미움받고, 책망받으며, 멸망당하는 자녀가 아니라 사랑받고, 보호받으며, 격려받고, 건강하게 성장해가는 자녀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은자가 되도록 합시다.
2 하나님의 무엇을 본받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본받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높습니다. 창조주를 볻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랑의 용서를 본받습니다.
본받다- 흉내내다, 따라하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따라합니다. 무엇이든 본보기를 따라하는 것이 제자가 상달되는 기본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해 봅시다. 때로는 희생을 치루며 용서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사랑의 사람으로 변해져 가게 됩니다. 이런 일은 할 수 없다고 강팍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역시 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나 가족이나 여러 인간관계에서 쓰라린 경험이 점점 커져서 고통이 더해져 갑니다. 해봅시다. 결단해 봅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볻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님께서 우리들 속에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리스도에 속한 자는 자기자신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깊은 자비와 용서의 태도를 모방하여 재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태복음18장 21-35절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질문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며 번이나 용서하여 주니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베드로는 얼마큼 실패를 연달아 해 왔을까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셀 수 있을 정도입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실패를 계속해 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면 그 다음은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까? 이대로 다루셨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곳에서 「일곱 번」이라 말씀하신 「일곱」은 완전수로, 「일흔 배」란 무한의 수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용서는 반복되는 횟수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한가지 예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중심적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크리스챤이라 공언하는 자가 자신에게 죄를 범한 자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커다란 죄의 책무를 용서해 주셨으므로, 우리도 죄를 범한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죄는 우리가 용서받은 죄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께 범한 우리들의 죄는 최소한으로 평가하고, 자신에게 범한 타인의 죄는 크게 확장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 결과 에베소서4:31〔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모든 악의〕를 그 사람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쏟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악독」 원어 피크리아 「화해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 원한을 갖는 것」
자신이 받은 굴욕이나 위험, 경시를 마음에 두고 노여움을 마음속에 키우는 것.
괴로운 경험. 크리스챤은 잊는 방법을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이 마음에서 분냄이나 노여움이 생깁니다.
「노함」 스모스 벼를 태우는 것 같은 불길과 같은 노여움.
일순간에 치미는 분노로 즉시 가라앉습니다.
「분냄」 오르게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집착하는 깊은 노여움
「떠드는 것」크라우게 화내는 사람의 감정이 폭발하여 소리가 되는 경우
「훼방하는 것」브라스헤미아 중상, 굴욕, 험담
이것들 모두는 「악의」 카키아 에서 나옵니다.
이것들은 이교도의 특징으로 모두를 버립시다.
크리스챤으로써 새롭게 태어난 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닮아 용서하는 마음을 발휘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기도문」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11: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않고 기도하는 자는 자신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타인을 용서하지 않고 거부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라도 효과있는 기도를 할 수 없다.」입으로만 기도하는 것은 할 수 있겠지만 기도의 대답을 확식할 수 는 없게됩니다.
고의로 용서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게되어 기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께 도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있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닮읍시다. 그러므로 믿음의 호흡을 회복합시다. 불신앙의 쓴 뿌리가 자신이나 가족이나 형제자매와의 관계를 점점 파괴하고 괴로움을 더욱 가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사랑의 원점으로 돌아갑시다.
용서하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실생활 속에서 사랑을 드러내도록 「고린도전서13:4-7」 이것의 중요점은 5:후반에서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으므로 그 때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맺음)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되다」입니다. 왜냐하면 ①우리는 하나님의 형체를 닮아 창조된 인간이므로, 골로새서3:9-10「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②우리들 속에는 도우시는 분 성령님이 계시므로 ③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셨으므로.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새 사람은 지금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됩시다. 자신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깊은 용서를 태도로 재현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