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年12月31日 ルカの福音書 1:46~56「マリアの讃美」B
序文)マリアの讃美は、彼女の深い謙遜と、清らかな慎みをもって、神が自分の内になさった大きいことを思い、喜びを込めてささげられました。継いで、50節から、彼女は神がすべての人々の中に、すなわち今でも私たちの中に行っておられる大いなるみわざと、そのお心を歌います。そして、この後半は、期せずしてイエス様のご生涯を指し示す預言ともなっているのです。
わたしたちは、ルカの福音書を読み進めるにと、イエス様が成し遂げられたお働きを、マリアの讃美の中に読み取ることができるのを発見します。
マリアの分類に従って人間を見るときに6種類の存在があるのです。主を恐れかしこむ者、低い者、飢えた者、心の思い高ぶる者、権力ある者、富む者であります。そしてそれぞれに対応して、神は6つのわざをなさいます。
今朝は神様が私たち人間に対して行われる、お働きを大きく三つに代表させて学び、神をかしこみおそれることの重要性に心を向けたいと存じます。
Ⅰ 神が私たちのためになしたもう第一のこと
1 51節イエスさまは「心の思いおごり高ぶる者を追い散らされます。」
このことは知恵めぐってなされます。ここで知恵というのはすべての人が満足と自負と誇りを感じるような高貴な賜物です。それには、霊的賜物の一切を含みます。判断力、理性、才智、才腕、義、徳、善ということばで、現されている内実を指します。
知恵はないよりもある方が良いと一般に考えられています。人間がお互い同士の間で優劣を競い、子どもたちは知育偏重の社会体制の中で偏差値教育に苦闘させられています。一つの分野に秀でることは高く評価されます。まして様々な分野に秀でるマルチ人間として立てる人は、その賜物を広く高く強く発揮します。ところがこれは人を危険に陥れるのです。おうおにして最も自信の強い人は、其の人格を変えてしまい、最も傲慢な人に育ててしまいます。最も強情な人をつくります。これは危ないのです。自分は事柄をよく知っている。自分は正しい。このような自負心、他の人よりも賢いのだとうぬぼれます。気づかないで他の人を追い散らしてしまうのです。しかし、神は、そのような者を追い散らされるのです。旧約聖書の中の知恵者で一頭地を抜いていたソロモン大王は、知恵を求め、知恵に従って生きるようにと述べて、数々の箴言を残し、伝道者の書には「今や、私は前より先にエルサレムにいた、誰よりも知恵を増し加えた私の心は多くの知恵と知識をえた。」(伝道者1:16)と書きました。その彼が一番大切なこととして言明したことばは「主を恐れることが知識の始めである」ということだったのです。このことを抜きにした知恵と知識は風を追いかけるようなもので、無駄な努力で、人生の真の意味を捕らえ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っています。それどころか、知恵が多くなれば悩みも多くなり、知識を増す者は悲しみを増す、とも言って
います。どんなに人が知恵と知識と才能をもって労苦しても、何の苦労もしなかった者に、自分の分け前を譲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もまた、むなしく非常に悪いことだ。(伝道2:21)
自分としては最高の知恵、知識、才能、判断力をもって、実らせたものを後継者が愚かであると、すべては水の泡となる。引退した後に一生の苦労が水の泡となるのを見ることほど耐えられないことはない。
人間の世界で知恵を巡って大切な点は、すべての善きものは、神から来る。神がわたしに知恵を恵もうとされるときは、それを受け取り、その同じ私たちから知恵を奪われるときは去らせるのです。このことを心に留めているかどうかが分かれ道でしょう。真理は神のもので、神が人にそれをお与えになるのです。そのとき人は神を恐れ敬い知恵の源であるお方にあって、それを100%生かすように生活するのです。どのように賢い人でも老年になると、神がその知恵を奪われることが起こり、人は子どもに帰るのです。しかし、神がその知恵を奪われないまま老年を迎える人は、80才でも90才でも現役ということも起こります。ようするに人間は自己の才能、自己の知恵、自己の霊的な賜物さえも、神が与えられるので増し加わり、神が奪われるので断念するという心を持って、主を恐れかしこんで歩むならば、神の憐れみは子々孫々、代々にわたって下されるのです。
Ⅱ .神が私たちのためになしたもう第二のこと
52節イエスさまは「権力ある者を王座から引き下ろし、卑しい者を引き上げられます。」権力ある者とは「すべての主権、身分の高貴と人がいっているもの、友人関係、位、栄誉を総括しており、さらにすべての権利、自由、便益、およそその中に含まれるすべてのもの」をさします。
神にこそ一切の主権の源があり、それぞれは自分に託された領域での主権しかないのです。権力ある者が、その威力と主権をたのみ、下にたつ義しい謙虚なものたちに傲慢な振る舞いをします。そのために低い者たちが害悪を受け苦痛にみまわれ、死およびあらゆる災いを受けねばならないとき、神はこれを引き倒されるのです。
歴史の証言によれば権力ある者が、その頂上にたっし、極限まで至るときに、彼らの内に絶対主権者である神が認められなければ、自分の存在を消滅させる方向にまっさかさまに落ちることを示しています。
アッシリア、バビロニア、べルシャ、ギリシャ、ローマ、中国、日本、ソ連、ルーマニア、ドイツ、どの国の統治者であっても、皆、例外ではありません。
これに比べて、神は低い者を高められる。世の見栄えのない者、無に等しき者を高められるのです。マリアは自分のような者を高めてくださった神をたたえているのです。キリストの前に立つとき、この世の地位やレッテルは何の主張も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ありのままのはだかの人間でしかないのです。イエスさまが、この地上にこられたのは、すべての人の救い主としてであります。イエスさまの目には、身分の高い低いでなく、一人の人として神の子たちとして覚えられているのを忘れてはなりません。
Ⅲ 神が私たちのためになしたもう第三のこと
53節イエスさまは「飢えているものを良いものであかせてくださいます。富んでいる者を空腹のままで帰らせられるのです。」「富は健康、容姿、財産など外的な財物のすべての総括をさします。」ここでは富そのものが攻撃され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アブラハムもイサクもヤコブも当時の世界では富める者でありました。聖書で富むことが罪だとは言われていません。要は、富みを得ているが、これにすべての価値をそそぎこんで、自分の欲望を求め、執着し、神の代わりに富みを据えるときに、ほろびを招くのです。
神は心を量られます。外形や貧しさ富みによって裁きません。その中でどのように心を処して生活しているかで、裁かれるのです。富みだけを求めて生活している者は、そのときに自分が全然、神の判定基準に通用するような生活の仕方をしてこなかったことに気がつくのです。
イエスさまの前に立つとき、富をまかされたものは、それをみ国のためにどのように用いたか、ほどこしたかが問われます。飢えているものが空手で帰らせられることがないためにです。たしかに人間のまことの養いが、神の口からでるみことばによるとき、み前にひざまずくものらは飽き足りるようになり、神の恵みを押し返すものは、空虚な日々を歩み続けるでしょう。
そういう意味では、飢えている者とは、単純に食物をわずかしかもたない者というのではないのです。働ける知恵と体があるのに、働かないで、飢えている者ことではない。自分の悪業の結果、飢えを招いている者のことではないのです。自分から神のゆえに欠乏を忍ぶ者や、真理のために他人に暴力をもって迫られ飢えに陥れられている者などのことです。エリヤはケリテ川のほとりで、飢えをしのび、神につかわされたカラスによって食物を得ました。ようするにどのような分野であっても、人が神ご自身によりたのみつつ生活しているなら、その者の飢えを見過ごしになされない。
結び)神はこのように知恵や権力や富をめぐって、ご自信のみこころを一人一人に実行されるお方です。神にその源のあることを、人が正しく受け取り、用いることをするとき、それはその人の祝福となるが、誤用し神を退け誇り高ぶり、むなしくようするとき、わざわいとなります。人間の力が強大になり一杯にその堤がふくれあがるとき、神は、み腕をもって、そのつつみに穴を開け、一切を空に帰せられるのです。他方神を恐れ敬うものの生涯には、憐れみが代々にわたって注がれて日々に生活の再生を経験させ、全生涯のおわりまで堅く支え保たれるのです。
2017년 12월 31일 누가복음1:46-56 「마리아의 찬가」B
서문) 마리아의 찬가는 그녀의 깊은 겸손과 청결, 신중함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큰 일을 깨달아 기뻐하며 바친 것이었습니다. 50절에 그녀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 속, 즉, 지금도 우리들 속에 일하고 계신 위대하심을 마음속 깊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에서는, 예상치 못한 예수님의 생애를 가리키는 예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을 읽어가면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마리아의 찬가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가를 보면 인간은 6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주리는 자, 비천한 자, 부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6가지 있습니다.
오늘 아침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행하시는 일들을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배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에 마음을 향하는 시간으로 하겠습니다.
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 첫번째
1 51절 예수님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이 말은 지혜를 통해 나온 말입니다. 지혜란 모든 사람이 만족과 자족, 긍지를 느끼게 되는 고귀한 은사입니다. 이것에는 영적은사를 모두 포함합니다. 판단력, 이성, 수지, 수완, 의, 덕, 선 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성질을 갖습니다.
지혜는 없는 것보다는 갖추는 것이 좋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이 서로간에 우월을 다투고, 자녀들도 지육편중 사회체제 속에 편사치교육에 고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은 높은 평가를 받게됩니다. 더욱이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멀티인간은 그 은사를 넓고 높고 강하게 발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위험에 빠뜨리게도 합니다. 자신이 강한 사람은 종종 인격을 바꾸고, 가장 거만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버리고 맙니다. 가장 비정한 사람을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자신은 모든 것을 잘 알고있으며,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자부심, 타인보다 똑똑한 것에 자만하는 것입니다. 본인도 깨닫지 못한 채 주변 사람들이 멀어져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흩으십니다.
구약성경중에 지혜자로 가장 뛰어났던 솔로몬 왕은 지혜를 구하고, 지혜에 따라 살아가라고 말했으며, 수많은 잠언을 남기고, 전도서에서는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전도서1:1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가 가장 소중한 것이라 말한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언9:10)입니다. 이것을 제외한 지혜와 지식은 바람을 쫓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무단한 노력이며, 인생의 참된 의미를 얻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혜가 많으면 근심도 많아지며, 지식이 더해지면 슬픔도 더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전도서2:21)
자신의 최고의 지혜, 지식, 재능, 판단력으로 열매맺은 것을 후계자가 어리석게 여기고, 모든 것이 거품처럼 됩니다. 은퇴한 후에 일생동안 노력한 것이 거품처럼 되어져가는 것을 보는 것처럼 괴로은 일은 없습니다.
인간세계에서 지혜를 둘러싼 중요한 점은 모든 선한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때는 그것을 받으며, 마찬가지로 우리에게서 지혜를 거두어 가시려 할때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는 것이 갈림길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지혜의 원천되신 분을 위해 100% 최대한 살리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노년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거두어가시게 되며, 인간은 아이처럼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혜를 거두지 않고 노년을 맞은 사람은 80세, 90세에도 현역으로 남게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자기능력, 자기 지혜, 자기 영적 은사조차도 하나님께 부여받아 점점 증가하거나, 거두어가실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자비는 자손 대대로 이어져가게 됩니다.
Ⅱ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하시는 일 두번째
52절 예수님은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권세있는 자란 「모든 주권, 신분이 고귀한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 친구관계, 지위, 영예를 총활하고 있으며, 더욱이 모든 권리, 자유, 변익, 이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주권의 원천이시며, 각각은 자신에게 부여된 영역의 주권밖에 없는 것입니다. 권세있는 자가 그 위력과 주권을 의지하고 그 아래의 의롭고 겸손한 자들에게 거만하게 행동합니다. 이 때문에 낮은자들이 악해를 입어 고통받거나, 죽음이나 재난을 받게될 때 하나님은 이것을 내리치십니다.
역사의 증언에 의하면, 권세있는 자가 그 정상에 도달했을 때,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떨어지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중국, 일본, 소련, 루마니아, 독일, 어떤 나라의 통치자라도 모두 예외일 수 는 없습니다.
이것에 비하여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여주십니다. 보잘 것 없는 자, 없는 것과 같은 자를 높여주십니다. 마리아는 자신과 같은 자를 높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이 세상의 지위나 평가는 어떤 주장도 펼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인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것은 모든 사람의 구세주로써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과 관계없이, 한사람의 인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써 기억해주시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Ⅲ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하시는 일 세번째
53절 예수님은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부요함은 건강, 외모, 재산 등, 외적 재물 모두를 말합니다. 이곳에서는 부요함 그 자체가 공격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당시에는 상당히 부요한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부요함이 죄라고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부요함을 얻었지만 이것에 모든 가치를 두며, 자신의 욕망을 구하고, 집착하며, 하나님 대신 부요함에 안주 할 때는 멸망을 초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외형이나 빈부함으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는지를 판단하십니다. 부유함만을 쫓는 생활은 하나님의 판단기준에 따르는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설 때, 부요함을 맡은 자는 천국을 위해 그것을 사용했는지 어떤지를 질문받게 됩니다. 굶주린 자가 빈 손으로 돌아가지 않게하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인간의 진정한 양육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그 앞에 엎드릴 때 굶주림은 채워지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물리치는 자는 공허한 날들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주리는 자란, 단순히 음식이 얼마없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일할 수 있는 지혜와 체력이 있음에도 일하지 않고 굶주리는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나쁜 행실의 결과, 주림을 초래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결빈을 참는 자나 진리를 위해 타인으로부터 폭력을 입어 굶주리고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엘리야가 그릿시내가에서 굶주림을 참으며,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분야에서도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하면 그 사람의 굶주림을 결코 그대로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맺음) 하나님은 이러한 지혜나 권력이나 부에 관해서 그분의 마음을 한사람한사람에게 실천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그 원천이 있음을, 사람이 올바르게 받고 사용할 때에 그 사람에게 있어서 축복이 되든지, 오용하여 하나님을 뒤로하고 거만하며 헛된 것에 사용할 때는 재앙이 됩니다. 인간의 능력이 강대해져 그 잔에 넘쳐 흐를 때 하나님은 그 팔로 구멍을 내고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십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애는 자비로움이 대대로 흘러내려가 매일매일의 생활속에 재생을 경험하며, 전 생애 끝까지 굳건하게 보호받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