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年4月16日イースター ヨハネ20:1-18 「見ずに信じる幸い」
序文)死からよみがえられた主は、疑い惑うトマスに会って言われました。「あなたはわたしを見たから信じたのですか。見ずに信じる者は幸いです」(ヨハネ20:29)。私たちは今、復活の主が天に戻られて父なる神の右の栄光の座にあって、執り成し続けてくださっていることを信じています。見ずに信じてます。主イエス様から幸いを受けています。しかし復活の証拠を見ても、誰もが信じる訳ではないのです。信仰がなければ神に喜ば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
1 20:1-10 復活の証拠を見ても信じられないマグダラのマリヤと信じたヨハネ
主イエスが復活された朝早く、マグダラのマリヤは墓に急いでいました。そして墓の入り口に蓋をしてあった大きな石が転がされているのを発見しました。大変驚いて、急いでペテロとヨハネの所に戻り報告しました。「誰かが墓から主を取って行きました。主をどこに置いたのか、私たちにはわかりません。」「私たち」と言っているので、墓に行ったのはマリヤ一人ではなく他にも一緒に行った女性がいた。ルカの福音書は「女たち」と書いている。マルコは「マグダラのマリヤとヤコブの母マリヤとサロメと書いている。彼らは、主イエスの遺体に香油を塗ろうとして墓に行った。大きな石の蓋をどうして転がすか心配していた。ところがすでに石は転がしてあり、イエスさまの体が墓の中になかった。「誰かが取って行った。」と考えた。前に「よみがえる」と言っておられたのに、信じられなかった。
ペテロとヨハネは、急いで墓に行った。若いヨハネが早く墓についた。入り口から中を覗き込んだ。亜麻布が置いてあるのを見たが、中に入らなかった。後から来た「ペテロは墓に入って。亜麻布が置いてあって、イエスの頭に巻かれていた布切れは、亜麻布と一緒にはなく、離れた所に巻かれたままになっているのを見た。そのとき、先に墓に着いたヨハネも入って来た。そして見て、信じた」(6-8節)。ペテロは、そこに主の体がないことを確認した。さらに盗まれたとか、布に巻いたままでどこかに運び去られたという訳でもなかった。紛れまなく、主の復活の証拠がそこにあった。しかし信じられなかった。ヨハネは「見て、信じた。」この短いしかし重要な言葉に注意しよう。「信じた。」主の愛された弟子ヨハネは、これらの証拠を見て、主はよみがえられたと信じた。彼は「復活の主に出会うことなく、見ずに信じる者」の最初の人となった。
この大きな差は何か。それは復活の証拠を見せられても、信仰がないものは信じられない。信仰のあるものは、見ずに信じる。
2 11-16節 「なぜ 泣いているのか」
マリヤは墓の外でたたずんで泣いていた。泣きながら、からだをかがめて墓の中をのぞきこんだ。なぜ、泣いたのか。愛するものを失った悲しみ、愛する人との交わりや、喜びや、分かち合った経験を思い出して、もうそのようなことができなくなってしまった悲しみの涙である。墓の前では多くの悲哀を味わいます。茫然自失です。何をやってももうだめ。そこに厳然たる死があるからです。しかし彼女はそこから離れがたくたたずんでいた。墓の中をのぞきこんだ。主を愛する故にです。近くいたいのです。彼女はそこに二人の御使いがいることを発見しました。彼らは彼女に言います「なぜ泣いているのですか。」彼女は答えます。「誰かが私の主を取って行きました。主をどこに置いたのか、私はわかりません」(13節)。御使いの出現も彼女を慰め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彼女はまだ主のからだは取り去られたと思い込んでいた。思い込みから離れられないでいた。死人が復活するはずがない。主イエスが復活するはずがない。思い込みは人生を狂わせる。あなたもそう思い込んで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永遠のいのちの喜びを受け取らせないように働く。
彼女がこう言ってから後ろを振り向いた。そこに主イエスが立っておられるのを見た。彼はマリヤに言った。「なぜ泣いているのか。誰をさがしているのですか。」しかし彼女はイエスだとわからなかった。彼女はイエスを園の管理人だと思った。「あなたがあの方を運んだのでしたら、どこに置いたのか言っ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私が引き取ります」(15節)。イエスのからだを移すことのできる一番可能性があるのは園の管理人であると思い込んだ。それは次々と認識を間違えさせる。でも主イエスを愛する真実が「私が引き取ります」と言った。彼女は自分が言っていることをよく考えないで言っている。彼女は遺体をどうして引き取り運ぶことができるのか。しかし熱心に、衝動的に、情熱的に、あの方への愛を込めて「私が引き取ります。」と言ったのです。彼女の目は閉ざされていた。エマオの途上の二人の弟子たちのように、一緒に並んで歩いて話している方がよみがえられたイエス様であるとわからなかった。
「あの方」は、そこにいて、自分に向かって言われたこの言葉を聞いた。死んだ人がよみがえるはずがない。ご遺体はどこかに運ばれたとの思い込みにより、彼女は間違った告白をしたけれども、主を愛する心情は、直接、目の前にいる「あの方・主」に伝わった。
主イエスは彼女に言われた。「マリヤ」この一言に、どれほども思いがこもっていることでしょう。人生の深みにあって、互いに親みあっている者同士が再会した時、多くの言葉は必要ない。一言で十分。マリヤはこの語りかけで一瞬にして主イエス様だと気づいた。それは普段に聞き慣れていた呼びかけであったからである。ヘブル語で「ラボニ(すなわち先生)。」と言った。
彼女は最初の復活の主に出会った信徒となった。主を信じる者たちへのイエス様の慈しみが溢れている。私たちの弱さに心を動かされる。私たちの思い込みからくる間違った判断、行動を受け止めてくださる。過度の悲しみによって打ちひしがれている者を理解し、無感覚にされている者のそばに立っておられる。主は、ご自分と人格に対する、真実で、心からの、勇気ある、耐え忍ぶ、徹底した愛をご覧になる時に、それがたとえ園の管理人だと間違えたとしても、その振る舞いを見ておられ、そのつぶやきを聞いておられて、知識にかけていることや、理解の遅いことも見逃してくださる。その上でみ声をかけてくださる。私たちはマリヤのようにすぐに「ラボニ」と言えるだろうか。
3 17-18節 行って告げよ!
主はマリヤに言われました。「わたしにすがりついてはいけません。わたしはまだ、父のもとに上っていないからです。」マリヤがすがりつこうとしたことを主は止められました。その意味は何でしょうか。マリヤは自分の気持ちばかりを大事にして、今は生きておられる愛するイエス様にすがりつこうとしました。主を自分の占有物であるかのように思ってしまっていた。利己的であった。しかし主は、父のもとに上っていないからと、止められました。それは救いの完成をお考えになっていたからです。父のもとに上って右の座につき、天に置いても地においても一切の権威を受け取ることが、私たちの救いの完成のために重要だったのです。
さらに主は他の弟子たちのことも考えておられたのです。散らされた哀れな弟子たち、主が死んで葬られたままだと思っている弟子たち、希望を打ち砕かれた者たち、彼らの過ちを許し、ペテロのように主を否んだりした者たちのことを最初に配慮された。彼らを「わたしの兄弟たち」と呼ばれた。ここには主が弟子たちを「兄弟たち」と呼ばれた最初の記事である。全てを許し、愛する兄弟たちと言っておられる。「わたしの兄弟たちの所に行って、彼らに、『わたしは、わたしの父またあなた方の父、わたしの神またあなた方の神のもとに上る』と告げなさい」(17節)。主は復活を告げよと言わないで、昇天することを告げよと言われた。やはり救いの完成に向かって次のステップに進もうとしているご自分を啓示されている。主のみわざの完成、結末、を迎えようとしている。昇天は重大な真理です。それは、次に、再臨をもたらすからです。
さて、マリヤに注意されたことから学ぶべきことは、信仰は自分一人で楽しんでおれば良いという道楽とは違うのということです。一人悟っていれば良いというのでもないのです。他の弟子たちに仕える使命があるのです。他の人に福音を伝えるとか、救うとか、愛するとか、世の光になるとか、地の塩になるとかです。マリヤは弟子たちのところに出かけて行って「わたしは主にお目にかかりました。」ということが求められていました(18節)。彼女はそうしたのです。
救いのみわざの完成に向かって今、日々を進んでいるとつげなければなりません。
結び)主イエス様は、今、生きておられます。十字架と復活の信仰は今もつたえてられ続けています。現代に続く、教会の存在が主のよみがえりのあかしです。信じる心を主があなたにお与えくださるように、今朝が、信仰のスタートとなりますように祈りましょう。
2017년 4월 16일 부활절 요한복음20:1-8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서문)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심한 도마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20:29) 우리는 지금 부활의 주님이 하늘로 돌아가셔서 아버지되신 하나님 우편의 영광의 보좌에 않으시고, 중보기도해 주시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입니다. 주예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증거를 보더라고 누구라도 이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 20:1-10 부활의 증거를 봐도 믿지 못하는 막달라 마리아와 믿은 요한
주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른 아침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무덤입구를 가로 막았던 커다란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단히 놀라 서둘러 돌아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보고했습니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우리가」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무덤에 간 것은 마리아 한명이 아니라 함께 간 다른 여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여자들」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려 무덤에 왔습니다. 어떻게 커다란 돌을 굴려야 할 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커다란 돌은 굴려져 있었으며, 예수님의 시체는 사라졌버렸습니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갔다」라고 생각했습니다.이전의「다시 살아나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서둘러 무덤에 갔습니다. 젊은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무덤 입구에서 안을 구푸려 보았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6-8절) 베드로는 그 곳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누군가가 훔쳤거나, 세마포에 싸인채로 어딘가 운반한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했습니다. 요한의 「보고 믿더라」 이 짧은, 그러나 중요한 말에 주목합시다. 「믿더라」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 요한은 이 증거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의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2 11-16절 「어찌하여 울며」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었습니다.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어째서 울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이나 기쁨, 함께 경험한 일들을 떠올리며, 이제는 그런 일들을 기대할 수 없는 슬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덤 앞에서 수많은 비애를 느끼게 됩니다. 만연자실입니다. 무엇을 해도 허무합니다. 그곳에는 엄연한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곳에서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무덤 속을 들여다 봤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때문입니다. 더욱 가까이 있고 깊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 두 명의 천사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13절) 천사도 그녀의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예수님의 몸을 어딘가에 두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잘못된 생각에서 떠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리가 없다.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리가 없다. 잘못된 편견은 인생을 그르치게 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잘못된 편견이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곳에 예수님이 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생각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15절) 예수님을 옮길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사람을 동산지기로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점점 더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가 가져 가리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기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어떻게 가져 갈 것인지 생각했을까요? 그러나 열심이, 충동적으로, 정열적으로 그 분에 대한 사랑을 담아 「내가 가져 가리이다」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은 가렸습니다. 엠마오를 향하던 도중의 두명의 제자들처럼 함께 걸어가며 대화하던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분」이 그 곳에 계시고, 자신을 향해 말씀하신 말을 들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부활했을 리가 없어. 시체는 어딘가로 운반되어진 것이라는 착각으로 그녀는 잘못된 고백을 했지만 예수님을 사랑한 마음은 직접, 눈 앞에 계신 「그 분∙주」께 전해졌습니다.
주 예수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야」 이 한마디에 얼마나 깊은 마음이 품어져 있었을가요? 인생의 깊음이 있으며,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이가 재회했을 때에는 많은 말은 필요 없습니다. 단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마리아는 이 말로 일순 예수님이라 알아보게 됩니다. 이것은 평소 들어왔던 명칭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랍오니(선생님)」이라 말했습니다.
그녀는 최초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신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가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연약한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리들의 편견에서 오는 잘못된 판단, 행동을 받아주십니다. 과거의 슬픔으로 주저 앉아있는 사람을 이해해주시고, 무감각해진 사람 곁에 있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분 자신과 인격에 대한 진실하고 마음으로부터 용기있는, 인내하고 참으며, 철저한 사랑을 보셨을 때에, 비록 그것이 동산지기로 잘못 생각해도, 그 행동을 보시고, 그 말하는 것을 들으시고, 지식이 부족한 것이나 이해하는 데 더딘 것도 눈감아 주십니다. 더욱이 말을 걸어 주십니다. 과연 우리는 마리아처럼 즉시 「랍오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3 17-18절 「가서 이르되」
주님은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지려 했을 때 예수님은 막으셨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리아는 자신의 기분만을 중요하게 여겨 살아계신 사랑하는 예수님께 다가가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생각해 버렸습니다.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으므로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완성을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로 올라가 오른편 보좌에 앉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를 받으시는 것이 우리들의 구원의 완성을 위한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하셨습니다. 뿔뿔히 흩어진 불쌍한 제자들, 예수님이 죽으시고 장사된 채라고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 소망이 깨져버린 자들, 잘못을 용서하시고,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정했던 자들을 가장 먼저 배려하셨습니다. 그들을 「내 형제들」로 부르셨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으로 「형제들」이라 부르셨습니다. 모든것을 용서하시고, 사랑하는 형제들이라 부르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재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게로 올라간다』 하라」(17절) 예수님은 부활을 전하도록 말씀하시지 않고 승천하실 것을 전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구원의 완성을 향해 다음 단계로 진행하시는 그 분을 계시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계획의 완성, 결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승천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것은 다음으로 재림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주의받은 것으로 우리가 배울 점은 믿음은 자신 한 사람만 좋으면 된다는 도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사람만 깨달아도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을 섬기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구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 세상의 빛이 되는 것, 땅의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돌아가 「내가 주를 보았다」 (18절)라고 전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그녀는 말씀대로 따랐습니다.
구원의 계획의 완성을 향해 지금도 진행되고 있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맺음) 주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대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교회의 존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믿는 마음을 당신에게 주시도록, 오늘 아침, 믿음의 출발이 되도록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