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年4月9日 棕櫚の日曜日礼拝 ヨハネ17:1-5 「大祭司の祈り」
序文)今年の受難週・イースター連続講解説教はヨハネの福音書と取り組みます。17章の前後文脈は、16章までに教えの務めを主が終えられた。それら教えの反映として17章の祈りがあります。執りなしの祈りは、大祭司としての務めであります。この後の章には、教え、祈ったことの実践が21章まで続いています。贖い主は逮捕され、裁判に遭い、十字架上の死を迎えました。さらに葬りと復活がつづきます。40日後に昇天されてから、現在に至る大祭司の務めは、次に記されているとおりです。「キリストは永遠に存在されるのであって、変わることのない祭司の務めを持っておられます。したがって、ご自分によって神に近づく人々を、完全に救うことがおできになります。キリストはいつも生きていて、彼らのために、とりなしをしておられるからです」(ヘブル人への手紙7章24-25節)。感謝します。
では、17章で何が執りなされたのかを見ましょう。
Ⅰ ご自分のための二つの祈り 1-5節
ご自分のための祈りのカギのことばは5回でてくる「栄光」です。
1つ目の祈りは「贖いの栄光」です(1-4節)。これは「時がきた」ことによってささげられました。それまでは「わたしの時はまだ来ていない」と言われていた。今や、地上生涯と伝道のクライマックスを示す「時がきた」のです。世の人はいつでも世より栄光を受ける機会があります。それは世は彼らを憎まず、否、憎むことができないからです。しかしイエスがこの世から与えられた待遇は、憎悪と恥辱でした。それは彼が世の悪しきことをあかしされたからでした。だからといってイエスに栄光が無いのではありません。ただ「時が来て」いなかったのです。すなわち、イエスが世に遣わされた使命を完全に果たされるのを待って、父なる神は彼の栄光を世の前に現したもうのでした。その使命とはいうまでもなく十字架上の贖いの死にありました。イエスの栄光が現される時は、彼の十字架の時に他ならないのでした。死によりて栄光を受ける時が来たのです。この意味で、イエスの祈りのご生涯における、この執りなしは「この時」にささげられることによって、父のみこころにかなった祈りとなり、時期を得た、確実に聞かれる祈りとなったのでした。苦しみの時が栄光を受ける時であるという、この祈りは、イエスと全人類にとって大切でした。イエスが高められ、そして彼の権威が全人類の上に充分に行使されうるのは、ただ苦しみを通してでありました。彼が王国の恵を分配されるのは十字架の上からです。このことは信じる者たちに永遠のいのちの賜物をもたらします。人々が信仰によって神のもとに導かれ永遠のいのちを分け与えられるとき、父なる神は最も大きな栄光を受けられるのです。
2つ目の祈りは「先在の栄光」です(5節)。この祈りは、贖いの業(わざ)の完成にもとづく栄光の結果、当然求められる祈りです。イエスの地上生涯の目的は、苦しみをとおして栄光をうけられることによって成就されるのでした。それ故に、イエスが父の所に帰り、世が創造される以前にすでにもっていた栄光「先在の栄光」(天での栄光)をみ前に再び輝かしてほしいと祈られたのです。この驚くべき祈りは、イエスの永遠の実在、本質において父と同質、力と栄光において同等の実在である事を示しています。この大祭司の祈りは、三位一体の神を具体的に現している所です。イエスは、ここでは神学者のようにではないけれども、三位一体の自覚と三位一体に固有な愛の息吹を豊かに満ち溢れさせておられ、私たちに最も深い神観をみさせて下さっています。その父との豊かな交わりを悟らせてくださっています。世との関係においては、ご自分の栄光が彼らの目に現れることを祈り、父との関係においては、ご自分と父との共にある栄光に入る事を祈っておられるのです。第一と第二の祈りは、私たちの大祭司イエスの完全な資格と業を充分に現しているのです。
Ⅱ 弟子たちのための二つの祈り 6−19節
主イエスは次に弟子たちのために二つの執りなしをされました。それは6-19節に5回でてくる「守る」「保護する」という言葉と、3回でてくる「聖別する」というカギの言葉で示されます。
第一の祈りは「聖徒の堅忍」です。第二は「聖徒の聖化」です。この二つの願いは「世にいなくなり、あなたのみもとにまいります」といわれたイエスの死のゆえにささげられた願いです。この世を去るにあたり、イエスは、残された者たちへのみ思いのすべてを祈りに現されたのでした。それには、どれほどの深い愛、行き届いた思いやり、徹底したご配慮が隠されていることでしょうか。この時まで主は弟子たちと一緒におられました。主でした。慰め主でした。同伴者でした。助け主でした。弟子たちが非難されるとすぐに弁護されました。失望すると、いつでも引き上げられました。心を悩ますと優しい慰め主として常にそばに立たれました。ところがこれからは事情が一変します。主は「この世にいなくなるのです」。その後に何が残りますか。それは信じる者の「集まり」です。彼はいなくなるのですが、神に属する人々、父に対してイエスが「あなたのもの」とおっしゃった人々、そして「わたしにくださった」と言われた人々が残るのです。イエスの教えと、彼の実践を通じて育てあげられ、保たれ、守られてきた「集まり」が、イエスの栄光をあらゆる時代を通じて現し続けるために残された人々です。この「集まり」の中に光があって、暗やみはこれを破壊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この「集まり」は起源において天からだからです。しかしそれにもかかわらず、世の中にあるのです。世の悪の影響下におかれていのです。世はこの「集まり」を憎みます。この「集まり」は四方敵に囲まれているのです。試みられ、誘惑されます。それで主は聖なる父が彼に属する人々を守り、保ち、聖くあ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と祈られたのです。すべての危険から完全に救出してください。あらゆる外からの攻撃に対して、彼らを保護してください。
この祈りによって「教会」(集まり)は、神により特別の目的のために、地上に立てられていることが知らされます。その目的は、イエスによって伝えられた啓示をこの世に伝え、イエスよって十字架の上に現された自己犠牲の愛を反映させるためでした。また、イエスの喜びを弟子たちが同じ喜びとして経験するためです(13節)。この世にとどまって福音を伝える事に励ま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ために教会が世から取り去られることをイエスはいのられなかったのです。またイエスは教会が世の憎しみから免除されることも祈られなかった。なぜならその憎しみは、イエスの弟子たちがこの世の規準に適合できない事に原因があり、決して避けることのできない事だからでした。悪しき者のもとにあるかぎりは、世と神の真理によって啓明された教会は、永遠に対立しているのです。一方は地上からであり、他方は天からだからです。イエスの願いは、ご自分が神の使徒としてその召命を成就したように、弟子たちが守られて使徒としての召命を成し遂げることでした(18節)。第一の「守ってください」という祈りは、その目的によって第二の祈り「聖別される」ことを必然的に引き起こしました。「真理によって彼らを聖別してください。」彼らがこの世で、その残された目的を果たすために「聖く」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世のものでない」ということは「聖いもの」である事を要求するのです。すなわち「聖なる父」「聖なる子」「聖なる霊」の「聖さ」に弟子たちはあづから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ために主は19節で言われているように、自らをまず聖別なさった。イエスは今の弟子たちと、未来に信徒となるすべての人々のためにその死において自らの罪の無い「人性」を聖別なさった。世の罪を取り除く完全なささげものとして、自ら犠牲となられた。旧約時代では、祭司は動物の犠牲をささげました。旧約の祭司はささげる時にまず自分を聖別して後に、動物をささげたのです。新約時代のもとで、罪の無い大祭司が自らの汚れの無いいのちを献げている。このことによって弟子たちは聖められるのです。この救いの真理によって、すなわち父の約束されたみことばによって聖めるられる。みことばによって、また、み子の贖いによって聖くされること、今までの人生観、世界観と全く相違した聖書の人生観、世界観を持ち、いままでの死にゆくいのちではなく、永遠のいのち、復活のいのちに日々豊かに生かされてゆくことが、主イエスの執りなしの祈りである事を忘れてはならない。
Ⅲ 後になって信じる聖徒たちのための二つの祈り 20-24節
イエスは弟子たちのための祈りの後に、全時代を通じて信仰者のために二つの祈りをされた。それは20-24節に四回出てくる「一つ」というカギのことばを中心にして示されている。第一は「一致」である。第二は「イエスと共にいること」である。主はすでに11節で「一つ」となることについて祈って祈られた。その際に、弟子たちの間で、この一致が本当のものとなることを祈られたが、また、彼らの伝道を通して信徒となる人々の聖別と一致がなるように祈っておられる。主は「守ってください」「聖別してください」とペテロ、ヨハネ、ヤコブたちのために祈っておられたが、その祈りの奥には「一致」ということが願われていた。主の声は。今や私たちのための声に変わった。主イエスの祈りのノートに私たちの名前がある。私たちのために主が「彼らがみな一つとなる」「彼らが全うされて一つとなるため」祈られた。それは三位一体の神が永遠に一つであるように、それ故に、私たちも一つとなるためです。人種、立場、教派、歴史の違いなどは関係が無く、一つとなる事を祈られた。それはあの祝福の満ちた三位一体の交わりの中で、み父とみ子と御霊が一つであるような、豊かで、現実的で、すばらしい姿においてである。この意味で何よりも一つであることは、生命的な結びつきにおいて示され、霊的、内的な事であることがはっきりと分かる。この一致は外面的機構上の併合とか、世界に統一された教会を造るということでは決してない。そのような働きは、イエスの祈られた事ではない。それどころか、むしろ真理の奥義からは遥かにほど遠いのである。この「一致」は「わたしを信じる」(20節)ことによって成就する。人が回心し、キリストがその人のうちに入って来られるとき、その人は即座に「キリストにある」者となる。そして生ける、かしらであるキリストを通して、その人は「キリストにある」他のすべての人たちと一つになる。パウロとルターとカルバンとウェスレーの間に、まさにこの点で深い一致がある。このような霊性における一致があればこそ、主の民は、この世を信服させるあかしをすることができる。また、彼らの一致が完全に一つと願われているように、完全性をえるために信徒たちが栄光のうちに高められた主といのちのつながりを保ち、彼のうちに溢れる栄光を凝視し、あづかることによって達成される。主は常に父の対照であった。そして信徒の相互の効果的な原因と力が主の愛にある事を知り、そこにあらわされた愛の栄光にあづかることが肝心である。
この「一致」のための祈りから、第二の「あなたがわたしに下さったものをわたしのいるところにいっしょにおらせてください」への変化は戦闘の教会から栄光の教会への執りなしの変化を示している。一致の完成は主イエスと信徒のすべてが顔と顔を会わせて相まみえる時に果たされる。それは栄光の教会においてである。「あなたがわたしを世の始まる前から愛しておられたためにわたしにくださったわたしの栄光を、彼らが見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24節)。
これはキリストにあるすべての聖徒たちの栄光により達成される。前には聖別される事を祈られた主は、今や、彼らが栄光をもって飾られる事を祈っている。この世に残されている信徒のために祈られた主は、その最後の、そして最大の望みとして信徒たちがすべて、天国に受け入れられることを祈っておられる。キリストと一緒にいる。栄光から栄光へと化えられる。そこに、一致と栄光の共同体が出現する。父の栄光とイエスの栄光と、聖霊の栄光と、教会の栄光が輝く共同体がある。永遠のいのちの一致、愛の一致、そして栄光の一致。人として求めうる最高の望みを主は、私たちのために祈られた。
祈りの結び)25-26節 結びでは、四つのことが言われている。イエスは父より遣わされて世にきた。しかし世は父を知らず、父の遣わされたイエスを受け入れない。神についての無知が世に広がっており、人類が暗やみに座している。光は闇に照り輝いているが、闇はこれを悟らなかった。では父の聖名はだれにも現されなかったのか。いや、そうではない。イエスご自身が「わたしはあなた方を知っている」と申し開きをなさった。キリストは他の誰もがなしえなかった仕方で神を知っておられた。だから、イエスは、わたしたちが良く知っている友人に話すように、いや、それ以上に深く確信を持って神に呼びかけておられる。そればかりか、父がイエスに賜った者たちもイエスを信じ受けて「父がわたしを遣わした」ことを知りこの無知の世にあって神の国の中核を形成したのである。「正しい父」の前に、世にある闇の子と、光の子とは別たれるのである。正しい父がこの無知の世にて神を知っている者たちを守って下さることにより、そのわざの困難さと、必要のために特別の恵を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求める。26節でキリストがなさったわざとこれからなさることと、そしてその目的が祈られて、この執りなしは終わる。御名を「これからも知らせます」とは助けぬ主聖霊が来られることで継続されている。主は、この執りなしの祈りを、今も、父の右に座して、祈っておられる。
「わたしが、これらのことをあなたがたに話したのは、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あって平安を持つためです。あなたがたは、世にあって患難があります。しかし、勇敢でありなさい。わたしはすでに世に勝ったのです」(ヨハネ16:33)。
2017년 4월 9일 종려주일 예배 요한복음17:1-5 「대제사장의 기도」
서문) 올해의 수난주, 부활절 연속강해설교는 요한복음을 통해 묵상하겠습니다. 17장의 전후문맥은 16장까지로, 가르침의 직무를 예수님께서 마치신 말씀입니다. 이 가르침들에 대한 반영으로 17장의 기도가 나와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중보기도는 대제사장으로써의 직무입니다. 이 후의 장에서는 가르침, 기도하신 것에 대한 실전이 21장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대속의 주님께서 체포되셔서, 재판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후 장사치러져 부활로 이어집니다. 부활하신 40일 후 승천하시고, 지금도 계속되는 대제사장의 직무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브리서 7장 24절-25절)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17장에서 어떤 말씀으로 중보기도하셨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Ⅰ 그 분 자신을 위한 두가지 기도 1-5절
그 분 자신을 위한 기도의 열쇠가 되는 말씀이 5번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영화」입니다.
첫번째 기도는 「대속의 영화」(1-4절)입니다. 이것은 「때가 이르러」바쳐진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지상생애와 전도의 클라이맥스가 되었습니다. 때가 이른 것입니다. 세상사람은 언제라도 세상보다 영화롭게 될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미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으로부터 부여받은 대우는 증악과 굴욕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악함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영화롭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때가 이르지」않은 것 뿐 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보내진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을 기다려,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 앞에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려 한 것입니다. 그 사명이란 말할 것도 없이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가 그의 십자가의 때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예수님의 기도의 생애에 있어서의 이 중보기도는 십자가에 바쳐지게 됨으로써 아버지의 뜻이 합당한 기도이며, 때를 얻은 확실하게 응답된 기도가 된 것이었습니다. 고난의 때가 영화롭게 되는 때라는 이 기도는 예수님과 전 인류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높이 들려져 그의 권위가 전인류 위에 행사되는 것은 고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국의 은혜를 분배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부터 입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합니다. 믿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인도되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때, 아버지 하나님은 가장 크게 영화롭게 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기도는 「선재의 영화」입니다.(5절) 이 기도는 대속의 업적의 완성으로 영화롭게 된 결과 당연하게 구하게 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목적은 괴로움을 통해 영화롭게 되심으로써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아버지께 돌아가셔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가지고 계셨던 영광 「선재의 영화」(하늘에서의 영화)를 하나님앞에서 다시 비취기를 원하시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도는 예수님의 영원한 실재,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간은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대제사장의 기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신학자들처럼 하지는 않으셨지만, 삼위일체의 자각과 삼위일체의 고유한 사랑의 입김을 풍성하게 흘려 보내시고, 우리에게 가장 깊은 하나님관을 보이셨습니다. 아버지와의 풍성한 교제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분의 영광이 그들 눈에 나타나도록 기도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분과 아버지가 함께 갖고 계신 영광에 들어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기도는 우리들의 대제사장 예수님의 완전한 자격과 업적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Ⅱ 제자들을 위한 두가지 기도 6-19절
다음으로 주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두가지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6-19절에 5번이나 나오고 있는 「지키다」 「보전하다」라는 말과, 3번 나오고 있는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첫번째 기도는「성도의 견인」입니다. 두번째는 「성도의 성화」입니다. 이 두가지 기도는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죽음 전에 바쳐진 기도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시므로 예수님은 남겨진 자들을 위한 모든 마음을 기도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이 기도에는 얼마나 큰 사랑, 깊은 자비, 철저한 배려가 숨겨져 있을까요? 이 때까지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이셨습니다. 위로의 주셨습니다. 동반자셨습니다. 도움의 주님이셨습니다. 제자들이 비난 받으면 언제나 변론해 주셨습니다. 실망할 때는 언제라도 끌어올려 주셨습니다. 걱정해주시고 다정하게 위로해 주시는 주님으로 언제나 곁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사정이 바뀌게 됩니다. 주님은 「세상에 더 있지」 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그것은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가 사라지지만, 하나님께 속한 자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사람들, 그리고 「내게 주신 자들」이라 말씀하신 자들이 남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실전을 통해 양육되어지고 보전되어지고 지켜지던 자들입니다. 이 「모임」 속에는 빛이 있어서 어두움은 이것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이 「모임」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시험당하고 유혹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결한 아버지께서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지키고, 보전하고 성결케 되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모든 위험으로부터 구출해 주시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외부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기도로 「교회」(모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특별한 목적을 갖고 지상에 세워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목적은 예수님으로부터 전해진 계시를 이 세상에 전하고,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자기희생의 사랑을 반영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경험하신 기쁨을 제자들도 경험하게 위한 것이었습니다. (13절) 이 세상에 머물러 복음 전하는 일을 돕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가 세상에서 거두어지도록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지않도록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미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세상의 규준에 적합하지 않으며, 그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악한 자들이 존재하는 한 세상과 하나님의 진리로 계명된 교회는 영원히 대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지상으로부터의 것이며, 다른 한쪽은 하늘에서부터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소망은 그 분이 하나님의 사도로써 사명을 성취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지켜져서 사도로써의 사명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18절) 첫번째의 「보전하기를」라는 기도는 그 목적에 있어서 두번째 기도 「거룩하게 하옵소서」를 필연적으로 일으키게 됩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저들이 이 세상에서 남겨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거룩」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라는 것은 「거룩한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거룩한 아버지」 「거룩한 아들」 「거룩한 영」의 「거룩함」에 제자들이 속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은 19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을 면저 성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의 제자들과 미래의 성도가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분의 죽음을 통해 죄없는 「인성」을 성별하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제거한 완전한 제물로써, 그분 자신께서 몸소 희생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동물을 희생물로 바쳤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제물을 바칠대 먼저 자신을 성별하고, 그 다음에 동물을 바셨습니다. 신약시대의 근본으로 죄없는 제사장이 자신의 정결한 생명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제자들이 정결케 된 것입니다. 이 구원의 진리로 아버지의 약속된 말씀으로 정결케됩니다. 말씀으로, 또한 아들의 희생으로 정결케 되는 것, 지금까지의 인생관, 세계관과 전혀 다른 성경의 인생관, 세계관을 갖고, 지금까지의 죽음을 향해 가는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으로 매일매일을 풍성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 주 예수님의 중보기도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Ⅲ 이 후에 믿게 될 성도들을 위한 두가지 기도 20-24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후, 모든 시대에 걸친 믿는 자들을 위해 두가지를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20-24절에 네 번 나오고 있는 「하나」라는 말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일치」입니다. 두번째는 「예수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11절에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 사이에 이 일치가 진실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는데, 또한 그들의 전도를 통해 믿게되는 자들의 성별과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전하기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라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드를 위해 기도하셨는데, 이 기도의 깊은 의미는 「일치」가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지금의 우리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님의 기도의 노트에 우리들의 이름도 적혀 있습니다.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저희도 하나가 되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라고 기도하셨습니다.이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영원히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되는 것입니다. 인종, 입장, 교파, 역사의 차이에 관계없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축복에 가득 찬 삼위일체의 교제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하나되는 것처럼, 풍성하게, 현실적으로 놀라운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되는 것은 생명적 결합으로 나타나는 영적, 내적인 일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치는 외면적 구조상의 결합이나, 세계적으로 통일된 교회를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일치」는 「나를 믿는」(20절) 것으로 성취됩니다. 인간이 마음을 고치고,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속에 들어가실 때, 그 사람은 동시에 「그리스도에 속한」자가 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에 속한」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루터나 칼뱅이나 웨슬리 사이에도 바로 이 점은 깊은 일치가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일치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복종시키는 증인이 되게 됩니다. 그들의 일치가 완전히 하나되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완전성을 얻도록 성도들이 영광속에 계신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갖고, 예수님으로부터 흘러 내리는 영광을 주시하고, 자신을 맡기는 것으로 달성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과 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상호 효과적 원인과 능력이 예수님의 사랑에 있음을 깨닫고, 그 분의 사랑의 영광에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일치」를 위한 기도에서, 「두번째의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로의 변화는 전투의 교회에서 영광의 교회로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치의 완성은 주 예수님과 신도 모두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영광의 교회에 있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절)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의 영광으로 달성됩니다. 전에는 성별된 것을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지금은 그들에 영광으로 단장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남겨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그리고 최대의 소망으로써 성도들 모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을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곳에 일치와 영광의 공동체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과 예수님의 영광과 성령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이 빛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일치, 사랑의 일치, 그리고 영광의 일치. 인간이 구해야 할 최고의 소망을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맺음) 25-26절 마지막 부분에서는 네가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버지를 알고 못하고, 아버지가 보내신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세상에 펴져, 인류가 어두움속에 살고 있습니다. 빛은 어두움에 빛을 비취지만, 어두움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이름은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누구도 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친한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 이상으로 깊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고 계십니다. 뿐만아니라 아버지가 예수님께 맡긴 자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것을 알게 됨으로써, 이 무지의 세상에서도 천국의 중요한 핵심을 형성한 것입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앞에 세상에 있는 어두움의 자녀와 빛의 자녀는 구별된 것입니다. 의로우신 아버지께서 이 무지의 세상에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들을 보호해 주심으로써 그 업적의 곤란함과 필요를 위한 특별한 은혜를 주시도록 구하고 계십니다. 26절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업적과 지금부터 하시는 일과, 그리고 그 목적이 기도되는 것으로 이 중보기도는 끝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또 알게 하리니」란 도우시는 분 성령께서 오시는 것으로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이 중보기도를 지금도 아버지의 오른편 보좌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