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年8月20日 マタイ5:3−4「心の貧しい者の幸い」
序文)主イエス様は、何をさして「幸いだなあ!」と言われましたか?「幸いだなあ!心の貧しい者は!」理由「天の御国はその人のものだからです。」次が「幸いだなあ!悲しむ者は!」理由「その人は慰められるからです。」三番目が「幸いだなあ!柔和な者は!」理由「その人は地を相続するからです。」この幸福論は7章27節まで続くのです。幸福を山のあなたに探し求めよといわれているのではなく、すでに幸福なのだよ!と福音を聞いている人々に語りかけておられるのです。
主イエス様の幸福論には霊的な論理に基づく順序があります。イエス様は思いつくままに、あれこれと語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先回話しましたように、詩篇1篇1節「幸いだなあ!」と歌い始めて、その響きが150篇終わりのハレルヤまで流れているのと同じように、「幸いだなあ!心の貧しい者は」と話し始められた中身は、7章の27節まで反響して流れているのです。さて、主イエス様が目の前にいる人々に「幸いだなあ」と言われたとき、その人々は「心の貧しい」人々だったのです。
Ⅰ 「心の貧しい」とは、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
1 心の貧しさがあれば、地上に生きている私たちが、生きながらにして、天の御国を所有するからだと言われています。天国に国籍を持っている人の基本的性格が「心が貧しい」という状態であるのです!
ルカの福音書のように単純に「貧しい者」のことではなく、マタイは「心の」とつけました。心の貧しさには、消極的面と積極的面があります。
「心が貧しい」ことの消極面は、心が豊かでない、空っぽである。空っぽなのでその自分自身にすべてを頼ることができない。他の人に頼らなければ生きていけない自分だと知っている。空っぽの心を他から満たしていただ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知っている人のことです。すでに自分自身に満ちている人は、十分だと思っているので、空っぽにならないと満たされることはない。天の御国を持つ必要がないのです。「それは幸いだなあ」の反対で「不幸だなあ」となりましょう。世間一般とは違う幸福論ですね。では、空っぽの心に、何を満たしていただくか。その心を満たすことのできる、他の人とは誰か。その人は何をあなたに満たすのか。
この問いかけに応えるのは、私たちを創造され、心も創造された救い主イエス様です。罪深く、生まれながらの自分自身に頼ることの危険を悟らされ、最後の審判者主イエスからくる裁きの宣告から解放していただけるために、主ご自身が身を以て贖いを成し遂げてくださった。十字架の福音を信じるのでなければ、滅びると自覚する心。信じて罪から解放をいただき、永遠のいのちを満たしていただける。新たな人生に主イエスの復活のいのちに結びついて誕生し生かされることが聖霊によって可能となったことを知る心。天の御国に生まれることによるいのちの豊かさに与る。これらのことは、心が貧しくないと求めないのです。
2 このような幸福論が示していることは、生まれながらの人と、キリストにより生まれ変わった人との本質的な違いがあるということでしょう。それで、何が違うかを主イエス様は7章27節までつづけて教えてくださっています。この世が賞賛していることは、自己信頼、自己確信、自己表現です。現代人の生き方を支配している考えです。世の人々にそれを知らせる。認識していただくことが多いほど成功者と言われています。心の貧しいではなくて、心が満ちているとの印象を他の人々に与えることで幸福になるのです。
3 主イエス様は、他の人々の前で、自分は罪深く、欠けていて、何をやらせてもうまくできない能力の無い者ですという者が、幸福だと言っておられ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誤解です。主は神の前で自分を省みてどのような心であるかを問うておられるのです。天地を創造し、今も摂理の中で全被造物を支配し、救いのために御子イエスを遣わして、十字架の身代わりの死に差し出し、墓に葬られた御子を死に打ち勝たせて復活させてくださったお方の前に出て、地上のいったい誰が自分は満ちていると主張できるでしょうか?それができる人は心が貧しいのではなく、思い高ぶっている人です。
自分に生まれつき備わらせてくださった賜物の数々を、自分が獲得して生まれてきたかのように思い違いしている心は、そのような数々の素晴らしい賜物を与えて、あなたを創造された創造者を思うこともない心の持ち主です。
外見が大事という話が流行っています。実はパウロは、ユダヤ人として誇りとする事柄が並外れて備わっていました(ピリピ3:3-6)。しかし彼はそのような自分を世間に押し出して、偉大な人格者であるという印象を与えたりしませんでした。それで敵対する人々は、「パウロの手紙は重みがあって力強いが、実際に会った場合の彼は弱々しく、その話しぶりは、なっていない。」(第二コリント10:10)と批判していました。
Ⅱ 心の貧しい積極面
1 神樣の前に自分は何者でも無いことを知っている人
モーセは神様からイスラエルの民を400年間の奴隷生活から導き出す使命を与えられたとき「ああ、主よ。私はことばの人ではありません。以前からそうでしたし、あなたがしもべに語られてからもそうです。私は口が重く、舌が重いのです」(出エジプト4:10-17)。モーセは課せられた任務に自分がふさわしくないことを深く感じ、自分の不十分さといたらなさをよく知っていました。主は彼に口を創造したのはわたしではないか、と怒られましたが、その上で彼を励まし、口の人アロンを共に遣わされました。
2 ペテロは生まれつき積極的で自己を主張し、自信に満ちた人でした。自己信頼に溢れていました。生まれながらの彼は心貧しくなかったのです。その彼が、ガリラヤ湖で漁をしていたとき、夜通し働いて一匹もとれなかった魚が、主イエス様のお言葉通りに網を入れたところ、たくさんの魚で二艘の船一杯になり、沈みそうになった出来事のさいして、主イエス・キリストを人格的にまっすぐに見たときに、「主よ、私のような者から離れてください。私は罪深い人間ですから」(ルカ5:8)、といいました。それ以後、ペテロの大胆さは失われることは無かったし、神経質で臆病な人になったわけではなかったのです。むしろ、主の前にその個性は輝きましたが、「心の貧しい」人と変えられたのでした。大使徒ペテロと神が作り替えられました。
3 使徒パウロは、サウロであったとき、私が私がと言ってパリサイ人たち、サドカイ人たち、律法学者たち、ユダヤ国会議サンヒドリンを動かして、クリスチャン迫害の許可状を手に、息を弾ませてダマスコ途上にきました。その時復活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出会いました。「サウロ、サウロ、何故、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とのみ声を聞いて以来、変えられました。自分のすべてを得とおもっていたのが、損と思うように変えられ、心貧しい人となりました。宣教旅行の途上でコリント教会に充てた手紙に書いています。「あなたがたといっしょにいたときの私は、弱く、恐れおののいていました」(第一コリント2:3)。また、「私たちは、救われる人々の中でも、神の前にかぐわしいキリストのかおりなのです。ある人たちにとっては、死から出て死に至らせるかおりであり、ある人たちにとっては、いのちから出ていのちに至らせるかおりです。このような務めにふさわしい者は、いったいだれでしょう」(第二コリント2:15-16)。この務めにふさわしい者といえば、使徒パウロほどふさわしかった人はいないと考えられます。しかし彼は自分は不十分である。「ふさわしい者は、いったいだれでしょう」「自分も含めてだれもいないですね」と言っています。
神の前に、心貧しい姿をみることができます。自分が、自分がではなく、主イエス・キリストがすべてとの心が溢れている。パウロは「私たちは自分自身を宣べ伝えるのではなく、主なるキリスト・イエスを宣べ伝えます。私たち自身は、イエスのために、あなた方に仕えるしもべなのです」(第二コリント4:5)、と言っています。
4 弟子たちは主に求め続けました。「信仰を増し加えてください」。主に遣わされた日々、村々、町々に出かけていって、彼らは、みことばを宣べ伝え、病の者をいやし、悪霊につかれた者を追い出して、正常にもどし、不思議なわざをした。その彼らが、自分たちの信仰を省みて「増し加えてくださいと」祈り求めている。あまりにも自分たちの信仰は弱くまずしいと感じていた。
心の貧しいとは、神の前に出れば無に帰してしまうような事柄を誇らない。積極的には、神の憐れみと、めぐみと、愛に、祝福に徹底的により頼む心でしょう。神から来るすべてのものを満たしていただいて、生きる。からっぽの心に神が必要を満たしつづけてくださることを信じるものの幸いです。自分一人の力で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何もなくなる。主イエス・キリストにしていただけることだと信じる信仰を増し加えてくださいと祈りつつ、生活する幸いをおぼえましょう。
結び)「幸いだなあ!」このような生活は、天の御国の住民だからです。天の御国の住民は心の貧しい者で成り立っているのです。ヨハネ黙示録1:5-6「イエス・キリストは私たちを愛して、その血によって私たちを罪から解き放ち、また、私たちを王国とし、ご自分の父である神のために祭司としてくださった方である。キリストの栄光と力が、とこしえにあるように。アーメン」
ヨハネ黙示録1:9「私ヨハネは、あなたがたの兄弟であり、あなたがたとともにイエスにある苦難と御国と忍耐とにあずかっている者であって、神のことばとイエスのあかしとのゆえに、パトモスという島にいた。」
使徒ヨハネは、主イエス・キリストが血によって救い出した私たちを、王国としたと書いています。さらに御国にあずかっているとも書いています。御国の王の王、主の主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を頭とする目には見えないが確実に存在する天の王国の一員と、信じる私たちをしてくださったといっています。私たちはまちがいなく御国の一員です。それで、「私たちの国籍は天にあります」(ピリピ3:20)。御国の一員ですから、国籍は天にあるのです。市民権があるのです。
2017년 8월 20일 마태복음 5:3-4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서문) 주 예수님은 무엇을 가리켜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 이유는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 두번째로 「복되도다. 애통하는 자는」 그 이유는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세번째로 「복되도다 온유한 자는」 그 이유는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이 행복론은 7장 27절까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행복을 산위에서 찾아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있는 자들에게 이미 복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 예수님의 행복론에는 영적 논리에 근거한 순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이것저것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지난번 말한 것처럼, 시편 1편1절의 「복있는 자」라고 시작된 것이, 150편의 마지막 할렐루야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신 가르침은 7장27절까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눈앞에 있던 사람들에게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Ⅰ 「심령이 가난한」 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1심령의 가난함이 있다면 지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천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에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기본 성격은 「마음이 가난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처럼 단순하게 「가난한 자」가 아니라, 마태는 「심령」을 붙였습니다. 심령의 가난함에는 소극적 면과 적극적면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의 소극적 면은 마음이 풍로로운 것이 아니라 텅빈 것입니다. 텅 비었으므로 자기자신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므로, 텅 비지 않으면 채워지는 일이 없습니다. 하늘 천국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복되도다」의 반대로 「화있도다」가 될 것입니다. 세상의 행복론과는 다른 이론입니다. 그렇다면 텅 비어버린 심령이 어떻게 채워질까요? 그 심령을 채울수 있는 다른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무엇으로 여러분을 채울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들을 창조하시고, 마음도 창조하신 구세주 예수님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 자기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고, 최후의 심판자이신 주 예수님의 심판의 선언에서 해방시켜주시기 위해 그 분 자신을 대속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고는 멸망하게 됨을 자각하는 마음. 믿고, 죄로부터의 해방되고,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새로운 인생에 주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에 맺여져 살아가는 것이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을 아는 마음. 천국에 태어나는 것으로 얻게되는 생명의 풍요로움. 이것들은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이러한 행복론은, 태어나면서부터의 사람과,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난 사람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다른자를 주 예수님은 7장27절까지 붙여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이 칭찬하고 있는 것은, 자기신용, 자기확신, 자기표현입니다.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립니다. 깨달은 후에 받는 것이 많을 수록 성공자로 불립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득 차 있는 듯한 인상을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3 주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은 죄인이며, 결함이 있고, 무엇을 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고, 어떠한 마음으로 있는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지금도 그 섭리속에 전 피조물을 지배하시고, 구원을 위해 아들 예수를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대속물로 죽음으로 내어주신, 장사지낸 아들을 죽음에서 건져내셔서 부활시키신 분 앞에 섰을 때, 지상의 그 어떤 존재가 충만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자만하고 있는 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에게 주신 여러 은사를 자신의 힘으로 획득한 것처럼 생각하는 마음은 이토록 놀랍고 많은 은사를 주시고 여러분을 창조하신 창조주를 생각하지 않는 자와 같습니다.
외견을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써 자랑할 만한 요소를 뛰어나게 갖추고 있었습니다.(빌립보서3:3-6)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신을 세상에 내보이며, 위대한 인격자로써의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적대하는 자들은「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고린도후서 10:10) 라고 비판했습니다.
Ⅱ 심령이 가난한 것의 적극적인 면
1 하나님 앞에 자신는 어떠한 존재도 아님을 알고 있는 사람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400년간의 노예생활로부터 인도할 사명을 받았을 때,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애굽기4:10-17) 모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어울리지 않음을 깊이 느끼며, 자신의 불충분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입을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이시라고 노여워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그를 격려하시며, 입의 사람 아론을 붙여주셨습니다.
2 베드로는 본래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하며 자신에 차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 밤을 새워 그물을 던져도 생선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것이 주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을 때, 수많은 생선을 낚아 두 척의 배가 가득 차, 가라앉게 될 정도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똑바로 보게되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5:8)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그의 대담함을 잃게되는 일도 없었으며, 신경질적인 소심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주님 앞에서 그의 개성은 빛을 발했지만,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도 베드로 바꾸셨습니다.
3 사도 바울이 사울이라 불리웠을 때, 내가, 내가라고 말하며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율법학자, 유대국회의 산헤드린을 움직여, 크리스챤 박해를 하기 위한 허가장을 손에 쥐고 다메섹에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은 후 변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익이라고 믿고 있던 것이 손이라고 여겨지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었습니다.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린도전서2:3) 또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후서2:15-16) 이 임무에 적격한 자는 사도 바울이상 없을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불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심령의 가난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되어주시는 마음으로 넘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후서4: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 제자들은 주님께 계속해서 구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매일매일, 각 마을, 각 도시로 파송될 때 그들은 말씀을 전하고, 병을 고치며, 악한 영을 내어쫓으며 놀라운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돌아보고 「더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믿음은 너무나 약하고 의지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란 하나님 앞에서 볼때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비, 은혜, 사랑, 축복에 철저하게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모든 것으로 가득 채워 살아갑니다. 텅 비어버린 마음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알고, 채워주실 것을 믿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자신 한사람의 힘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은 사라지게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주심을 믿는 믿음을 더욱 크게 해주시도록 기도하며 생활하는 복된 삶을 기억합시다.
맺음) 「복되도다」 이러한 생활은 천국의 주민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주민은 심령이 가능한 자로 성립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요한계시록1: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도요한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신 우리를 왕국으로 하셨다고 쓰고 있습니다. 더욱이 천국을 물려받게 된다고 쓰고 있습니다. 천국의 왕의 와, 주의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하늘 왕국의 일원이라고, 믿는 우리들을 일원으로 삼아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틀리없이 우리는 천국의 일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서3:20) 천국의 일원이므로 국적은 하늘에 있습니다. 시민권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