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年6月17日 マタイの福音書6章9-15節「負い目をゆるし」
「私たちの負い目をお赦しください。私たちに負い目のある人たちをゆるします。」主イエス様を信じて、父よ、と祈り始めた者が、パンのこと、日常必要な一切合切を祈ることを先週学びました。そのように祈っていますか。次に、祈ることはこの体の必要は私たちが生きるための一面でしかないことを主は教え、他者との交わり、神との交わりの中に生きるという、もう一面があることを知らされます。生き生きとした交わりの生活が成り立つために、自分の心の中にある罪の咎めや、負い目からの解放が現実に必要なのです。
1 主は、そのために私たちの負い目をお赦しくださいと祈るようにと教えられました。負い目と翻訳されている言葉は、負債、借財とも訳すことができます。当然払うべきものを払わなかったこと、すなわち義務を果たさなかったことに当てはめる言葉です。それは新約聖書で、罪を表現する五つの言葉の一つなのです。ちなみに他の四つは「的を外す」「踏み越える」「すべって踏み外す」「不法」です。
私たちは「みこころが地上でもおこなわれますように。そのためにパンをください」と祈ってパンを与えられたのです。ところが、では、そのパンで、神様の目的に自分を用いているかというと、どうもうまくいかない場合が多いのです。やっぱり自分の心のままに用いて、自分の名があがめられるために用いてしまいがちです。いうならば神様のために生かしていただいているのですが、どういうわけか知らず知らずのうちに、神様の栄光を表す以外の目的に向けて生きているのです。ある者は意識的にそのように生きています。当然ささげるはずの感謝を神様にささげていないのです。賛美もささげていないのです。
いやそのようなことはない。ちゃんとささげている、といいますが、それでも何とはなしに負い目を感じているのです。事実、神様の恵みの豊かさに対して私たちは損害と負債だけを与え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わせられます。
受けている恵みほどに十分に、あふれるように感謝と賛美と栄光を神様に帰しているでしょうか。
それで、そのような神様との関係の悪化を改善していただくために、赦される以外に道はないのです。この負い目は自分の力では払いきれないし、償う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そこで主イエス様に祈ります。おゆるしくださいと。ですから主の祈りを祈る者は、自分が神様に対して日ごとに罪を犯している負い目があるということを明白に率直にみとめて赦しを願っているのです。
はたして、あなたはそのように、このことを胸にしみじみと感じて祈っておられるでしょうか。私たちが、真心から、神様の憐れみを覚えて、自分は主の道に万全でなく、まだまだ欠け目が多く、主に負い目をもつものだとくだかれて、天の父に近づくなら、神はそのくだかれた者の魂に近くおられます。赦しを宣言し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の、神様への負債が、イエス・キリスト様の十字架の死を持って支払われたのです。それ以外に償う方法がなかったのです。それほどの犠牲、代価を払うほどに大きい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ます。
神様が私たちを赦すためになされた御子による十字架の犠牲を、一人静かに思い巡らしましょう。「彼は、私たちのそむきの罪のために刺し通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彼の打ち傷によって、私たちはいやされた。私たちはみな、羊のようにさまよい、おのおの、自分かってな道に向かって行った。しかし、主は、私たちのすべての咎を彼に負わせた。・・・彼は多くの人の罪を負い、そむいた人たちのためにとりなしをする」(イザヤ53:5-6、12)。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たので、神からの栄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ただ、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のゆえに、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のです」(ローマ3:23-24)。
2 今朝の祈りは、自分の何かの努力や、良きこと、あるいは他人の功績によりすがって、神様を満足させようとするような考えでするのでは決してありません。ですからこの祈りは、私たちが負債のある者を赦しましたから、それを条件として、私たちを赦してくださいと祈っているのでは決してありません。
新しい訳は「私たちに負い目のある人たちをゆるします」となっています。原語での時制を単純に訳すと「ゆるしました。」としていいのですが、最近の言語学上の研究により、現在形で訳した方が良いとの説が有力で、今回の改定に際して、翻訳委員会は「ゆるします」としました。これは、単なる約束ではありません。将来に向かって、これから私は、「負い目のある人たちを赦します」という決意の表明ととり、そのように祈るのです。
主はここで、神様の赦しの根拠を論じておられるのはありません。赦しの根拠はただただキリスト・イエスの十字架上の身代わりの死によってだけです。
ここでは、赦しを求める者の態度が問われているのです。
人と人との間の負い目を赦すのには、大変な憐れみと必要としています。そのように一方的なあわれみをもって、私を赦してくださいと祈ります。クリスチャンは、この祈りの前提として、神様の一方的な赦し、憐れみを受けたのです。それで、もし私たちがあくまでも自分の側の権利を主張して、他の人の義務を強要するのならば、それは負債を一方的に神様から赦されたことを理解していないのではないか。赦します、と決意を表明して、あゆむだけの重要な根拠が、主イエス様からの十字架の犠牲を伴う赦しをすでに受けているから、私たちは、ほかの人たちの自分への負い目を赦そうという祈りなのです。
また他の人は赦したりしない。古い負い目を帳消しにはしない、悪意、憤り、憎しみという心の奥底につもっているものが、他人との関係をくもらせ、依然として償いを要求しておりながら、一方でどのようにして良心を持って自分を赦してほしいと神様に祈れるでしょうか。非常に偽善的な態度しか取りえない。神様はこのようなごまかしはすぐに見抜かれるのです。
14-15節は、12節の補足になっている。しかし、ここでは、18:23-35節から導き出された、赦すことと赦されることの関係を生き生きと説明されているので、そのまとめ的にマタイが付け加えたと考えられる。
マタイ18:23-35 一万タラントの負債。新約聖書時代、一タラントは約36万円、一万なら36億円です。100デナリ:一デナリは57円60銭。5760円。
正確な換算とはいえませんが、比喩として見てください。36億円の借財を主人の憐れみでゆるしてもらった者が、5760円の負債を負っている者を赦せないというのです。そのような法外なことがあるでしょう
主人はいいます。「『私がおまえをあわれんでやったように、おまえも仲間をあわれんでやるべきではないか。』こうして、主人は怒って、借金を全部返すまで、彼を獄吏に引き渡した。あなたがたもそれぞれ、心から兄弟を赦さないなら、天のわたしの父も、あなたがたに、このようになさるのです。」
私たちが兄弟の罪を心から赦さないなら、天の父も私たちの罪を赦さないということ、また私たちが神様に貸した罪は一万タラントよりもはるかに大きな額であること、しかし人が私に向かって犯す罪は100デナリ程度の小ささだと言うことです。罪を悔い改めて、主イエス様を信じるなら、罪の赦しを受けます。ではなぜ、イエス様は他人の罪をゆるすなら、わたしの赦しを受けると言われたのでしょうか。
自分の罪を悟り、まことに神様の前で自分の罪を悔い改めるなら、自分自身は救われることのできない罪人であることを悟り、主に全面的に信頼することで赦されたことを知った者は、自分に対して罪を犯した人を赦してあげたいとの心が自然に湧いてくる。そうではなくて、兄弟の罪を赦すこころがないような人だとすれば、それこそ自分の罪が神様の前にどれほど大きいかを悟らないで悔い改めることもできない人です。ですから、そのような人は当然に神様から赦されることはないのです。
私が他人を赦すことができ、また自ら進んで赦そうとする度合いは、私が自分に対する父なる神様の赦しを個人的に経験した度合いの明確な現れです。また、自ら進んで他の人を赦そうとしない人は誰でも、神の愛に満ちた赦しを確実には知って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
結び)最後に 赦しに伴う祝福
たましいにおける平安。他の人をゆるした人。自分の負い目をゆるされた人は、こころからの平安を与えられます。
さらに人間関係における平和、たましいに平安を持っている人は、他の人との間に平和な関係をつくりだすことができる。ゆるしと和解のあるところに平和があります。これは人間生活の日常に大切な祝福をもたらします。
「それゆえ、神に選ばれた者、聖なる、愛されている者として、あなたがたは深い同情心、慈愛、謙遜、柔和、寛容を身に着けなさい。互いに忍び合い、だれかがほかの人に不満を抱くことがあっても、互いに赦し合いなさい。主があなたがたを赦してくださっ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そうしなさい。そして、これらすべての上に、愛を着けなさい。愛は結びの帯として完全なものです」(コロサイ3:12-14)。
2012년6월3일 주기도문 시리즈6
마태복음 6장9-13절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 죄도 용서해 주소서.。」
주님을 믿고 아버지 라고 기도하며, 양식, 그리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을
기도하는것이다 라고 전주에 배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다음으로 기도할것은 이 몸이 필요한 것들은 우리들이 살아가기위해 일시적으로
필요한것에 불가한것이다 라고 주님이 가르쳐 주시며 다른 사람과의 교제, 하나
님과 교제를 통한 삶이 있다는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살아 있는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에게 있는 죄와 욕심으로 부터 해방
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주님은 그것을 위해서 우리들에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기를 가르쳐주셨습
니다. 죄지은자 라고 번역한 말은 부채, 채무라고도 말합니다.
당연이 지불해야할것을 지불한지 못한상태, 즉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것,
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서 죄를 표현할때 사용하는 다섯가지
말중 한가지 입니다. 즉 다른 네가지는「표적에 벗어남」
「짊고 넘어감」「모든것을벗어남」「불법」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서 이루지기 위해 빵을 주십시요 라고 기도하고
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빵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우리들이 다가갈수 있을까요
많은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자기 욕심 그대로, 자기을 앞새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것인가요.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 이외에
살아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어떤 사람은 의식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연이 감사를 드릴 하나님에게 드리지 않습니다.
찬송도 드리지 않습니다. 예 그렇지 않습니다 잘 드리고 있습니다 말하지만
어딘가에 죄지은 모습이 느껴집니다. 사실 하나님에 넘치는 은혜에 대해서
우리들은 손해와 부채만큼 그정도로만 받는다 생각합니다.
받은 만큼 충분하게 넘치는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려 드리고 있
습니까.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 악화를 개선하기 위해 용서이외에 길이 없
습니다. 이 죄는 자기 자신에 힘으로는 지불하기 불가능하며, 보상할수 없
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용서해주십시요 . 때문에 주님의 기도를
기도하는자는 자기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매일 죄를 범하는 죄지은자임을 명백하
게 알고 솔직하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자 여러분은 이렇게 이러한 것들을 가슴속 깊이 새겨 기도하고 계십니까.
우리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에 너그러우심을 생각하고 자기자신은 주님의 길에
완전한자가 아니고, 많은 결점이 있으며, 죄지은자임을 고백하고, 하늘 아버지
에게 가까이 다가선다면 하나님은 그 깨어진 영혼을 거두어 주실것입니다.
용서를 선언해주십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에 대한 부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가 죽음으로 지불된것입니다. 그것외에 보상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정도로 희생댓가를 지불할 만큼 큰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용서하기 위해 외 아들을 십자가에 주신 희생을 한 사람 한사람 조용히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고 우리의 악함이 그를 짓뭉갰다. 그가 책망을 받아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아서 우리의 병이 나은 것이다、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 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시고 그를 공격하셨다.。」이사야 53:5-6、
로마서3:23-24「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못합니다、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2 오늘 아침 기도는 자기에 어떠한 노력이나 좋은 일, 또는 다른 사람에 공적
으로 하나님을 만족하게 한다고 생각하는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때문에 이 기도
는 우리들이 부채있는자를 용서했기 때문에 그 조건으로 우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하나님에 용서의 근거를 논하는것이 아닙니다. 용서의 근거
는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의 죽음 뿐입니다. 여기에서는 용서
를 구하는자에 태도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지은죄를 용서
하는것은 매우 어려운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일방적인 마음으로 우리
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것입니다. 그리스찬은 이 기도를 전제로 하나님의 일
방적인 용서, 너그러움을 받은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결국에 자기 쪽에 권리
만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의 의무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부채를 일방적으로 하
나님으로 부터 용서받았다고 이해할수없지 않을까. 또한 다른 사람을 용서하
지 못해, 오래된 부채를 장부로 부터 지울수 없어. 악의, 분노, 증오로 가득한
가슴속 깊은 것들이 있어 그것들이 타인과의 관계를 어렵게 하고, 당연히
보상을 요구하면서 한면으로 어떻게 해야 좋은 양심를 가지고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게 되죠. 매우 위선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8:23-35 1만달란트 부채
신약시대에는 1달란트는 약 36만엔 1만이니가 36억엔입니다. 100데나리
1데나리는 57엔60전,5760엔 정확하게 환산할순 없지만 말입니다.
비유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36억엔의 부채를 주인에 너그러움으로 용서 받은
자가 5,760엔 부채를 진자를 용서하지 않은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을수 있을
까요. 주인은 말합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처럼 너도 그자를 용서해야 하지 않은가。』이렇게 주인은 화가 나서 부채를 모두 반환할때 까지 그를 감옥에
넣었습니다. 여러분도 각자 마음으로 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는것, 또한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범한 죄는 1만달란트보다 무겁다는것, 그러나 사람들이 나에게 범하는 죄는 100
데나리정도로 작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면 우리를
용서해주신다 했을까요. 자기에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회개 한자라면 자기자신 구원을 받지 못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에게 전면적으로 신뢰함으로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자기에게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해주고 싶다는 것이 자연적으로 생겨 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형제의 죄를 용서할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사람은
그것으로 자기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것인가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그러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지 못할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수 있는것과 자기 스스로 용서할려 하는것은
내 자신이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를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된것을 명백하게 표현
하는것입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누구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를 확실하게 깨닫지 못한것입니다.
결론) 마지막으로 용서에 따른 축복 영혼에 평안.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
자기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마음으로 부터 평안을 받습니다.
더욱더 인간관계에서 평화, 영혼에 평안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도
평화적 관계를 만들수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가 있는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 생활의 일상에 매우 중요한 축복을 가져 옵니다.
골로세서3:12-14「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 곧 거룩하고 사랑하심을 받은 사람들같이 긍휼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거리가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온전하게 묶는 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