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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年9月23日バイリンガル韓国語礼拝 音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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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書:ピリピ1書19−26
説教題 : 「私にとっては、生きることはキリスト」

恵み深い父なる神様。
今日も感謝します。今から御言葉の時間を持ちます。聖霊様が私たちの内に働きかけてください。神様の御言葉を理解できるように導いてください。すべてのことを感謝し、イエス様の御名によって祈ります。アーメン。

은혜가 풍성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감사를 드립니다.지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갖습니다. 성령 께서 우리 안에 역사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1.二つの救い
1.두가지 구원

私たちはパウロの伝導を応援したピリピ教会に送ったピリピ人への手紙を連続で学んでいます。パウロは18節を見ると「すると、どういうことになりますか。つまり、見せかけであろうとも、真実であろうとも、あらゆるしかたで、キリストが宣べ伝えられているのであって、このことを私は喜んでいます。そうです、今からも喜ぶことでしょう。」と告白しています。

우리들은 바울의 전도를 응원했던 빌립보 교회에 보낸 빌립보서를 연속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바울은 18 절을 보면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パウロは自分が獄中で死ぬかもしれない危機的な状態であっても、これからの自分の働きが終わりになっても、自分が攻撃され名誉に傷がつくことがあっても、肉体的は苦しい投獄にあり、精神的はねたむ人々から苦しみを受けていってもパウロが命をかけて愛するキリストが宣べ伝えられていることだけで、パウロは大いに喜んでいます。

바울은 자신이 옥중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 상황에서도, 앞으로의 자신의 일이 끝이 나고, 자신이 공격당해 명예에 손상을 입어도,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운 감옥에 있고 정신적는 질투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난을 당해도 바울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그리스도가 전파되었다는 단지 그 이유로 바울은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パウロの願いはそれしかないし、それで十分でありました。それぐらいキリストが宣べ伝えることが大切でありました。19節ではこのことが私の救いとなることを私は知っているからです。と告白しています。このことは福音宣教に伴って、パウロに起きたすべてのことを意味します。

바울의 소원은 그것 밖에 없고,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가 전파 것이 중요했습니다. 19 절에서는 이 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 선교에 함으로써, 바울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パウロは自分の身の周りに起きている良いことも悪いこともすべてのことを通して益にしてくださる神様の御業を信じていました。ですから、パウロは喜んでいます。それが、自分の救いとなることを知っていると言っています。その救いは二つの意意味が含まれていると考えることが出来ます。

바울은 자신의 몸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것을 통하여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 구원은 두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一つはパウロが再びピリピの教会の人々と再会す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その願いを込めたことで、獄中から解放され再びピリピの教会の人々と再会することが救いであります。

첫번째 의미는 바울이 다시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재회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염원을 담은 것으로, 옥중에서 풀려나 다시 빌립보 교회 사람들과 재회 할 구원입니다.

もう一つは霊的な救いであります。パウロは25節で、私は、その二つのものの間に板ばさみとなっています。私の願いは、世を去ってキリストとともにいることです。実はそのほうが、はるかにまさっています。と言っているからです。それらのものはピリピの教会の人々の祈りとイエス・キリストの御霊の助けによるものだと言っています。

또 하나는 영적인 구원입니다. 바울은 25 절에서,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것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パウロは信仰による祈りの大切さを述べています。祈りの力を体験し、それを信じているパウロはそれに頼ってると告白しています。また、イエス・キリストの御霊の助けによる働きが不可欠であると言っています。聖霊様の助けと働きが信じる者にとって命の原理であり源であります。信じる者は御霊に導かれ力を受けるのです。パウロはその力を信じているのです。それが自分の救いに不可欠なものだといっています。

바울은 믿음으로 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힘을 체험하고 그것을 믿고 바울은 그것을 의지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움으로 일하심이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의 도움과 일하심을 믿는 자에게 생명의 원리이고 근원입니다. 믿는자는 성령에 이끌려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능력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どんな場合にも、いつものように今も
2. 아무 일에든지, 지금도 전과 같이

20節で、パウロは「それは私の切なる祈りと願いにかなっています。すなわち、どんな場合にも恥じることなく、いつものように今も大胆に語って、生きるにも死ぬにも私の身によって、キリストがあがめられることです。」と言っています。

20 절에서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パウロは裁判の結果がどうなるか関係なく、ただキリストのために生きたし、将来キリストの前に立つ者だから何一つ迷うことなく裁判の結果を待つことを意味します。パウロは裁判の結果とは関係なく裁判場で、異邦人と多くの人々にキリストを宣べ伝え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

바울은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관계없이 단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있고, 장래에 그리스도 앞에 설것이므로 한점 흔들림없이 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재판 결과와 관계없이 재판장에서, 이방인과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전파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どんな場合にも恥じることなく、いつものように今も大胆に語ることを願っています。パウロはその裁判が最後の宣教になるかもしれないことを考えていますが、それでもキリストを宣べ伝えることを考えています。今日の命を延ばすことより、永遠の命に価値を置いている信仰の行動であります。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말하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재판이 마지막 선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생명을 연장하기보다 영원한 생명과 면류관에 가치를 두고 있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パウロはそれが、どんな場合にも恥じることなく、いつものように今も大胆に語ることを切に祈り、願っています。パウロの信仰の特徴はどんな場合にも恥じることがないことです。今、自分の命の危険を覚えるパウロはぶれることなく、どうしたらイエス様を証できるかと願っています。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말하는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의 특징은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느끼지만 바울은 흔들림없이 어떻게하면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また、それがいつものように今も大胆に語ることを願っています。その時だけ特別なことであることではなく、すでに生活全般に身に着いたことで今もやることです。パウロの生き方を通して私たちも二つのことを学ぶことができます。それはどんな場合にもいつものようにすることです。

또한 그것이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 때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생활 전반에 몸에 배인것으로 지금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평소처럼 하는 것입니다.

先ず、どんな場合にもイエス様を証することを避けたり、恥としてはいけないことです。しかし、私たちはイエス様を証することで、パウロのように命の危険を感じることは起こりません。ただ、この話は言いづらい、この話をすると相手が私をどう思うか等のことで戸惑うことはほとんどであります。福音はすばらしいことで、良いことですが自分は恥を感じたくない、自分は損したくない自己中心な姿からなかなか変えられない姿があります。

먼저,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피하거나 부그러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님을 증명함으로써 바울처럼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것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이 이야기는 말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거나, 이 이야기를하면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의 것으로 주저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복음은 좋은 것, 좋은 일이지만 자신은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아, 자신은 손해 싶지 않은 자기 중심적인 모습으로 부터 잘 변하지 않은 모습이 있습니다.

それはパウロから始め、招代教会の聖徒たちと多くの信仰の先輩だちの生き方と大きな違いがあります。彼らがもらった福音は私たちの福音と違うもので、もっと強力なものでしたか。それは違います。私たちの福音は彼らがもっらた福音と全く同じもので、ある意味、今日の私たちが受け着いた福音はもっと力強いもので、彼も知らないことを私たちは知ることができました。

그것은 바울을 시작하여 초대교회 성도들과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삶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이 받은 복음은 우리들이 받은 복음과 다른 것으로, 더 강력한 것이 었습니까? 그렇치 않습니다. 우리들이 받은 복음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과 완전히 동일하며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전해받은 복음은 더욱 강력한 것으로, 그들도 몰랐던 것을 우리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何が問題でしょうか。それは自己中心からイエス様中心にならないからです。イエス様を信じてもまだ、自分が中心、自分が主になっていることです。自分が罪の奴隷からイエス様の自由ある奴隷に変わったことを知らないし、認めないからです。私たちは主人が変わったことです。悪魔の主人からイエス様が主人になったのです。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것은 자기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아직 자신이 중심이며 자신이 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의 노예에서 예수님의 자유의 노예로 바뀐 것을 모르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악마의 주인에서 예수님이 주인이 된 것입니다.

しかし、主人になるイエス様の代わりに自分が主人になっていることです。ですから、自分の身の安全、自分のことが一番になることです。私たちは自分のすべての時間、健康、家族、お金、賜、すべてのことの所有権がイエス様にあることを認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がイエス様が主人になることで、イエス様に満たされ支配されることを意味します。

그러나 주인이 되는 예수님 대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의 안전, 자신이 가장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시간, 건강, 가족, 돈, 달란트 모든의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것으로 예수님으로 충만해져 그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そうなると自然にパウロと同じくいつものように証する人になることです。パウロはその日のために特別に練習し、準備し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彼の生き方がそうだったのです。私たちも同じです。いつか、機械があればではなく、今そのように生きるかどうかです。いつか出来るかどうかどうかは誰も分からないし、出来ないと思った方が良いです。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바울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 날을 위해 특별히 연습하고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찬스가 있으면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살것인다 아닌가 입니다. 언젠가 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大切なことは今の生活の瞬間瞬間にイエス様の証人として生きていることです。それらものが日々重なっていると危機的な状態であり、大事な時さえいつものようにイエス様の証人として生き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そうでないとイエス様を知らないと否認する過ちが起きることです。日々の生き方が大切です。日曜日だけでは不十分です。

중요한 것은 지금의 삶의 순간 순간에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 것이 날마다 쌓여서 환난의 때에, 중요한 때 조차 언제나처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 수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실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의 방식이 중요합니다. 일요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3.生きるにも死ぬにも
3.살든지 죽든지

続けてみると21節でパウロは私にとっては、生きることはキリスト、死ぬことも益です。と告白しています。生きることはキリストとはキリストのために生きる生き方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が生き方の救いという意味でもありません。それは生き方そのものがキリストであることを意味します。キリスト者がキリストと一つになっていることを意味します。

계속 보면 21 절에 바울은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삶의 구원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것은 삶 자체가 그리스도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その生き方そのものがキリストによって支配され、真実、愛、希望、従順、宣べ伝えることなどが生き方、すなわち生活の中で生かされそれが豊かに現れることを意味します。パウロが生きていますが、その生き方はイエス様が生きている状態です。パウロの生き方を通してキリストが現れていることです。それはパウロだから、パウロだけの特別な、特権ではありません。

그 삶 자체가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되고, 진실, 사랑, 희망, 순종, 전도 등이 삶, 즉 생활 속에서 살아있고 그것이 풍성하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살아 있지만, 그 삶은 예수님이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바울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이기때문에 바울 만의 특별한 권한이 아닙니다.

イエス様を信じる者はだれでも出来ることです。いや、それが本来の私たちの生き方です。だれでも神様を見たこともないし、見ることが出来ません。しかし、イエス様を見た人は神様を見たことです。ですから、私たちがキリストに支配されることによって、私たちに内在するイエス様の姿が現れます。それで、人々がそれを見て神様を見ることになり、救いに導かれるのです。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라도 할 수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본래의 우리의 삶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 지배 됨으로써 우리에게 내재 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보고 하나님을 보게되어 구원으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パウロは続けて死ぬことも益です。と告白しています。パウロにとって死は怖いもので、避けた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パウロの死は彼の生涯の完成であり、愛するイエス様に会いに行くことでした。そこには永遠の冠と慰めが待っている栄光の場であります。そこで、イエス様と永遠に祝福の中で生きることです。

바울은 계속해서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무서운 것,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의 삶의 완성이며,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원한 멸류관과 안락이 기다리고 있는 영광스러운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과 영원히 축복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この世の辛くって、イエス様に栄光を返すことと誉れを捧げることを妨げたものからの解放でもありました。パウロは確かな復活と神の国に対する希望がありました。ですから、死ぬことも益になるのです。私たちの告白も同じ告白になるべきです。

이 세상에서 힘들게 하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찬송을 올려 드리는 것을 막았던 것으로 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확실한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는것도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고백도 같은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皆さんは本当に心から同じ告白をしていますか。生きることはキリスト、死ぬことも益ですと。

여러분 정말로 진심으로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고

もしかしたら、そこまでは言えないと。もうちょっと待ってくださいやることはあるからと言っていませんか。

어쩌면 거기까지는 말할 수 없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それは神の国に対する希望が足りないことです。それは復活の希望が足りないことです。それはこの世で自分の手で握っているものが多いからです。それはこの世で自分の力でやりたい、やったことが多いからです。あるいは他の福音、あるいは歪んでいる福音を信じているからです。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소망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손으로 쥐고 있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힘으로 원하는, 해놓은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는 다른 복음, 혹은 왜곡된 복음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十字架の許しのめぐみによる悔い改めと神の国に対する希望、すなわち復活の希望がない信仰は危ないです。信仰が前に進まないことは止まってい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罪に腐っていることです。なぜならば、私たちの肉はまで生きているし、信仰は生き物だからです。ですから、イエス様に日々、瞬間瞬間頼らないことは罪に支配されることになります。残念ですが、信仰には中間地点はありません。黒か白か二つしかないです。

십자가의 용서의 은총에 의한 회개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 즉 부활의 소망이 없는 믿음은 위험합니다. 믿음이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 것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에 인해 썩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 가운데 살아 있고, 믿음은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날마다 순간 순간 의지하지 않는 것은 죄에 지배되는 것입니다. 유감이지만, 신앙에 중간 지점은 없습니다. 검정 또는 백색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4.結論
4.결론

パウロは獄中であっても、世を去ってキリストとともにいることが、はるかにまさっていると思いました。しかし、もう一度ピリピ教会に行くことも望みました。25節と26節でパウロがもう一度ピリピ教会の人々に会うことを確信しています。その確かな理由は記されてないからわかりませんが、パウロにとって生きるにも死ぬにもすべてが主の御手にあることを確信しています。

바울은 옥중에서도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빌립보 교회성도들에게 가는 것도 기대했습니다. 25 절과 26 절에서 바울이 다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만나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확실한 이유는 적혀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살든지 죽든지 이 모든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その確信があるからどんな場合にも、いつものように今も前に進むことが出来ることです。私たちも自分中心の生き方から悔い改め、すべての領域において神様の主権を認め、イエス様が主人であることを告白しましょう。

그 확신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언제나처럼 지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회개하고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주인임을 고백합시다.

朝起きる時から夜寝ぬ時まで「主よ。今も導いて下さい。私は主のものです。主が私の唇から心、そして、すべてを支配してください。そして私の代わりに生きて下さい。イエス様の姿が私の生活に現れるように。」と祈りましょう。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밤에 잠들때까지 “주님 지금 인도해 주십시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입술에서 마음까지, 그리고 모든 것을 통치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삶을 주장해 주세요. 예수님의 모습이 내 삶에 나타나도록” 이라고 기도합시다.

そして、その祈りにより整えた生活、すなわち生き方によって私たちも「どんな場合にも恥じることなく、いつものように今も大胆に語って、生きるにも死ぬにも私の身によって、キリストがあがめられることです。私にとっては、生きることはキリスト、死ぬことも益です。」と告白することが本当の自分の告白になるでしょう。

그리고 그 기도가 쌓이고 쌓여서된 생활, 즉 그러한 삶을 살때 우리들도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자신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お祈りします。
기도합니다.

恵み深い神様。
今日の御言葉に感謝します。
私たちは救われましたが、いつも自分中心であり、イエス様より自分を大切にしています。主よ、その罪をを許して下さい。私たちのすべてのものは主のものです。主なる神様であることを心から認めるように導いて下さい。

은혜가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
오늘 말씀에 감사를드립니다.
우리들은 구원받았지만, 항상 자신 중심이며, 예수님보다 자신을 소중히 하고 있습니다. 주님, 그 죄를 용서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되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인정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そして、イエス様が真の主人になってください。どんな場合にも恥じることなく、いつものように今も大胆に語って、生きるにも死ぬにも私の身によって、キリストがあがめられることです。私にとっては、生きることはキリスト、死ぬことも益です。と告白出来るように導いて下さい。
すべてのことを感謝し、愛する主イエス様の御名で祈ります。アーメン。

그리고 예수님이 진정한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고 고백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세요.
모든 것을 감사하고 사랑한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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