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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年9月11日 礼拝 説教(日本語文、韓国語文)エペソ3章12-13節


 
2016年9月11日 エペソ3:12-13 「大胆か落胆か」

序文)キリストにおいて、成し遂げられた神の永遠のご計画が、歴史的時間の中で実現して、私たちの永遠の選びも完成してゆきます。だから、それは、天地を包含し時間も永遠も含むものであるから、わたしたちはキリストにあって大胆に近づくことができる。

Ⅰ 大胆に神に近づく

1 信じる者は神に遠い存在ではなく、近い存在である。それも大胆に近づく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大胆——自由に何を言ってもよい。キリストにあって罪赦され、自由の霊を与えられ恐れることなく、確信を持って、神への信頼をもち、信仰生活全体において近づいてゆきます。

「まずわれわれが、神の約束を信じる。つづいてその結果として、確信をいただく。心に平安を得る。そこから、大胆さが生まれる。それがおそれを全く去って、我々をして大胆にたえず神に向かわせるのである。」(カルビン)

2 ヘブル4:16「ですから、私たちは 大胆に恵みの御座に近づこうではありませんか。」

神の恵みの御座に出て拝謁することが赦されている。大胆にである。神の恵みの受取人とされている。御座は全世界を、そこから治めておられるお方が座しておられる。天国は計画通りに喜んで神に従い続けている。逆らう地獄とその勢力は神の不興に震え上がっている座である。

神に近づく事は本来やきつくす火であるので、足の履物を脱いで、この上なくへりくだって礼拝する。親密さは良いが、不遜であってはならない。大胆さは必要であるが、厚かましくないように。私たちは地上にいるのであって、このお方は天上の御座におられるのですから。

3 黙示録4~5章を読むと、「神の御座」が、主イエス様の贖いの結果、信じる者にとっては、「恵みの御座」になったことが分かります。「天の御座」王の存在、命令をくだす方、公の場、主権の象徴、万物を支配する座。御座という語は4~5章に17回もあらわれる。御座は天の神殿の中心にある。「その座にいます方は・・・」御座には父なる神が威厳を持っておられる。使徒ヨハネは神ご自身を描いているのではない。神は描くことが出来る方ではない。彼が描くのは神の光りであり、輝きである。幻にあらわれたもう神は、その聖を象徴する透明な白い、焼き尽くすダイヤモンドの輝き(21:11)に包まれ、また、エホバのこの聖なるご性質がさばきにおいて表れる事を示す燃える七つのともしびであり、御座から発する稲妻と、もろもろの声と、雷鳴である。(14:5)。これが聖なる神である。これが威厳ある神の御座である。地とそこに住む人々よ、神の前に震えおののけ。しかも御座の周りには、神の子らにとって嵐がすぎ去ったことを意味する半透明の緑色の虹が見える。キリストが哀れな罪人の位置に代わって立ち給う。長く隠れていた太陽が雲の中から差し込んでいる。神の聖は罪を赦すことがお出来にならず、必ず裁きという形で表されるものであるが、にもかかわらず、苦悩を味わうというそのことは、罪人を救済し、その聖化を進めるという目的がある。殺戮、貧困、戦争、飢餓、疫病を含めて、全てのことは、神の愛する者たち、即ちご計画に従って召された者たちのためには、共に働いて益となるのである。威厳ある神さまの御座は、その前で取りなしてくださる偉大な大祭司・贖い主がおられるので、恵みの御座となっている。

4 聖書は罪贖われたクリスチャンたちに、実に自由に大胆にあらゆる恐怖心から解放されて、神の恵みの御座に近づくことが出来ると表明しています。そこは罪深い者たちにはとうてい達し得ない聖なる御座であるのではなくて、すでに私たちの大祭司であるイエスさまが座しておられます。あわれみと恵みをくださろうとして座しておられます。おりにかなった助けを与えるためにです。私たちは、イエス様から来る、あわれみとめぐみが生活をしてゆく上で不可欠であることを認めて、大胆におりにかなった助けを求めて御座に近づきましょう。それが神が人にもとめられていることです。私たちが、試みや危険に遭遇するときに、いつでもおりにかなった助けを受けるために、すべての恵みと力をいただけるように祈りましょう。神に近づく道は祈ることです。

 

Ⅱ エペソ3:13 落胆しないでください

「  使徒パウロが異邦人の為に福音を伝えた。そのことが原因で、今は、囚人となっている。ローマ帝国の獄屋に繋がれている。エペソの信徒がそれをどのように受け止めればよいのか。

1 二通りの反応が起こった。落胆した者たちと、大胆になるものたちである。

落胆した者たちは、パウロが元気で順調に飛び回っている事を聞いている間は、福音のすばらしさをほめたたえていた。しかし一旦、挫折し、迫害をうけ、病んだとなると、神の愛や、正義を疑い、躓いた。福音は幸福しかもたらさないと思っている人にとって、不幸や苦難をももたらすと知った時の驚きは大変なものである。苦難、迫害などが自分に直接利害関係をもたらし、損失を与えるとわかると、パウロとの交わりから遠ざかってしまうのです。

2 他方、益々大胆になる信徒もいた。第二テモテ1:16〜18に出てくるオネシポロは最後まで忠実で、パウロがローマのどこに収容されているかを熱心に探しまわり、危険をかえりみずに見つけ出して、苦難のパウロを励まし元気つけた。またローマの教会の人々は落胆しないとパウロが考えていた事がピリピの手紙でわかります。(ピリピ1:12〜14)。ピリピの教会の信徒たちも「苦しみゆえの激しい試練の中にあっても、彼らの満ちあふれる喜びは、その極度の貧しさにもかかわらず、溢れ出し、その惜しみなく施し富みとなった」(第二コリント8:2)。

福音は幸福しかもたらさないのではなくて、神の恵みをもたらすのです。幸福は恵みの中の一つにしかすぎないのです。いろいろの恵みがあります。苦難の中のめぐみ、病の中のめぐみ、試練の中の恵です。神の摂理の故に、すべての恵みと受け止める信仰をあたえられているのです。

3 パウロ自身の信仰は「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のために、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だけではなく、キリストのために苦しみをも賜ったのです」(ピリピ1:9)というのです。苦しみは賜物だというのです。救われている故の純粋な恵みなのです。キリストの故に受ける苦難は、具体的には、「あなた方のために受ける苦難」としてあらわれるのです。宣教によって計り知ることができないキリストの富を受け取ります。人々のために苦難です。救われていない人々のために宣教する事に伴う苦難のすべては、これから救われる家族・友人・隣人のための苦難です。さらには既に救いに与った主の信徒達にための苦難でもあったのです。パウロの苦難、信仰者の宣教の故の苦難は、その福音の恵みを受け取る者のためには光栄なのです。苦難は、福音をうけとる者たちへの神の愛のあかしです。苦難は異邦人伝道の価値の高さを表しています。それは受け取る者たちに取っては栄誉であり、栄光なのです。

 

Ⅲ 神のご計画は苦難により挫折することはない

パウロが苦難にあっており、囚人である事によって、神の救いの永遠の計画は挫折してしまうのでしょうか?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第二テモテ2:9-10「私は、福音のために、苦しみを受け、犯罪者のようにつながれています。しかし、神のことばは、繋がれてはいません。ですから、私は選ばれた人たちのために、すべてのことを耐え忍びます。それは、彼らもまた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救いと、それとともに、とこしえの栄光を受け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人間に苦難が押し寄せても、神のことばは挫折しないのです。繋いでおく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人間は神から出た不滅の福音を滅ぼすことはできません。

人はたとい、神からのメッセージがあろうと、迫害されたり、投獄されたりするなら、そうした目先の事柄だけで、その本質を見損なってしまいがちですが、神の永遠のご計画は人間の邪悪な妨害や迫害などによって、決して変更され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の永遠のご計画は摂理を通して実現を続けていくのです。落胆する必要はなく、大胆であってよいのです。

 

結び)キリストのために、苦難をともにしている人々は、教会の苦難、宣教の苦難によって落胆などはしません。日常において苦難をともにしないで、逃げまわっており、幸福しか期待しない人々は、苦難に襲われると落胆し、日和見になるでしょう。

主の十字架の苦難と復活、昇天の栄光を覚えて、福音のゆえに、神に近づいて、大胆に祈ってまいりましょう。

 

2016 9 11 에베소서3:12-13 담대하든지 낙심하든지

서문) 그리스도께서 성취해주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역사적 시간속에서 실현되어 우리의 영원한 선택도 완성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천지를 둘러싼 시간도 영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Ⅰ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감

믿는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존재가 아니라 가까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도 담대하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담대-자유롭게 무언가를 말해도 좋다.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받아, 자유의 영을 받아 두려움없이,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믿음생활 전체에 있어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그런 다음에 그 결과로 확신을 얻는다.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 이곳에서 담대함이 생겨난다. 그것이 두려움을 모두 없애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향하게 해 준다.」(칼뱅)

 

2 히브리서4:16「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그 분을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담대하게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좌에는 전 세계를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 앉아 계십니다. 천국은 그 분의 계획대로 기뻐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지옥과 그 세력은 하나님의 노여워하심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본래는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이므로, 신발을 벗고 더할 나위없이 자기를 낮추어 예배하는 것입니다. 친밀한 것은 좋지만, 불손해서는 안됩니다. 담대함은 필요하지만, 뻔뻔스럽지 않도록. 우리는 지상에 머물고 있으며, 이 분은 하늘 위 보좌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 요한계시록 4∼5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예수님의 대속의 결과, 믿는자들에게는 「은혜의 보좌」가 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늘의 보좌」 왕의 존재, 명령을 내리는 분. 공적 장소, 주권의 상징, 만물을 지배하시는 보좌. 보좌라는 단어는 4∼5장에 17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보좌는 하늘 성전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보좌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위엄을 갖고 계십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그릴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가 그린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광채입니다.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 성결하심을 상징하는 투명한 흰색, 태워버릴 듯한 다이아몬드의 광채(21:11)에 들러싸여, 또한 여호와의 이 성결한 성질이 심판하실 때에 드러나 일곱개의 대접이 되며, 보좌에서 나오는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됩니다.(4:5) 이것이 성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권위있는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땅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보좌 주위에는 태풍이 지나갔음을 의미하는 반투명의 녹색 무지개가 있는 것을 하나님의 아들들은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불쌍한 죄인의 자리에 대신 서 계십니다. 오랜동안 숨겨져 있던 태양이 구름속에서 빛을 비춥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성결은 죄를 용서할 수 없으셔서, 반드시 심판이라는 형태로 나타내시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겪게되는 것으로 죄인을 구제하시며, 그 성화를 전진시키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살륙, 빈곤, 전쟁, 기아, 전염병을 포함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불리움을 받은 자들을 위해 함께 일하시며, 선을 이뤄주시는 것입니다. 위엄있으신 하나님의 보좌는 그 앞에서 중보기도해 주시는 위대한 대제사장∙구속의 주님께서 계시므로, 은혜의 보좌가 되어있습니다.

 

 성경에는 대속받은 크리스챤들에게 실제로 자유롭게 담대하게 모든 공포심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 갈 수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 곳은 죄인들이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성스러운 보좌가 아니라, 이미 우리들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자비와 은혜를 주시려고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도움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자비와 은혜로 생활해 나가는 이상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인정하고, 담대하게 도움을 구하며 보좌에 나아갑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이나 위험에 빠졌을 때, 언제라도 도움을 받기 위해 모든 은혜와 능력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은 기도입니다.

 

Ⅱ 에베소서3:13 낙심치 말라

사도바울은 이방인을 위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원인으로 지금은 옥에 갖히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에베소의 성도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두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낙담한 자들과 담대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낙담한 자들은 사도바울이 건강하고 순조롭게 이곳 저곳을 다니며 전도 하던 동안에는 복음의 놀라움을 찬양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좌절되고 박해를 받으며, 병들었음을 알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정의를 의심하고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복음에는 행복만이 따른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행이나 고난이 따르는 것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은 대단해 컸을 것입니다. 고난, 박해등이 자신에게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게하고, 손실이 있음을 알게되면, 사도바울과의 교제로부터 멀어져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편, 더욱 담대하게 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1:16-18에 나오고 있는 오네시모는 최후까지 충실하게, 사도 바울이 로마의 어느곳에 수용되어있는지를 열심히 찾아,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를 찾아내어, 고난 중의 사도바울을 격려했습니다. 또한 로마교회의 사람들은 낙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생각했던 것이 빌립보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1:12-14)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도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린도후서8:2)

복음은 축복만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도 얻는 것입니다. 축복은 은혜 중의 한가지에 지나기 않습니다. 은혜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고난중에 입게되는 은혜, 병중에서 입게되는 은혜, 시련속에 입게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써, 모든 은혜라 받아들이는 믿음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립보서1:29) 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음로써 얻게되는 순수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받게되는 고난은 구체적으로 「너희를 위한 환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선교를 통해 알게된 그리스도의 축복을 얻게됩니다. 사람들을 위한 고난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선교하는 것에 따르는 모든 고난은 이제부터 구원받게 될 가족, 친구, 이웃을 위한 고난입니다. 더욱이 구원받은 주님의 성도들을 위한 고난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난, 선교로 인해 받게되는 고난은 복음의 은혜를 얻게될 자를 위해서는 영광인 것입니다. 고난은 복음받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고난은 이방인 전도에 대한 커다란 가치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은혜를 받는 자들에게는 영예로운 일이며 영광인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계획은 고난으로 좌절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난을 맞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영원한 계획이 좌절될까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디모데후서2:9-10 「복음을 위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인간에게 고난이 덮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좌절되지 않습니다. 영향받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불변한 복음을 없앨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메세지를 받거나, 박해를 당하거나 투옥되면, 그러한 눈앞의 일로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곤합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자악한 방해나 박해로 변경되는 일을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은 섭리를 통해 실현되어 가고 있습니다. 낙담할 필요없이 대담해야 할 것입니다.

 

맺음)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의 고난, 선교의 고난때문에 낙담하는 일은 없습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고난을 함께 하지 않고 피하면서 행복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맞이하면 낙담하는 기회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승천의 영광을 기억하여, 복음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며 담대하게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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